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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 산 Aug 27. 2024

언령言靈

사물에 정령이 깃든다고 믿는 것을 토테미즘이라고 한다. 토테미즘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대한 경이로움과 두려움이 혼재하던 사유의 결과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 유전자 지도가 해독되고, 달 너머 화성에 가고자 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고 해서, 인간이 이 사유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간은 아마 영원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욕망에서 기인한 불안이 늘 인간 존재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도 예수도 진리를 목이 터져라 목숨 바쳐 외쳤지만 수천 년이 지나도 역시 부처와 예수의 목소리는 유효하다.


나 또한 부뚜막에 신이 있고, 마을 어귀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에 신이 깃들었다고 여기지는 않는 현대적 인간이다. 그러나 언령言靈은 믿는다. 언령이라는 것이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미 이 언령을 어떤 방식으로든 들었거나, 경험했거나, 믿거나, 부정해 보았다.


언령은 좁게는 컬트영화에 나오는 주문에 해당한다. 검은 사제들이나 파묘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이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와 소통할 때 주문을 외운다. 엑소시스트류의 영화에서는 악마의 정확한 이름을 알고 말하는 것만으로 퇴마가 가능하다고 설정되어 있다. 이것은 원시시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종교의 영역에 가깝다.


내가 믿는다고 말하는 광의의 언령은 타인에게 말하는 말과 내 자신에게 말하는 말에 담겨있는 메시지에는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타인을 비난하는 것, 자신과 남을 비교하는 말을 하는 것, 정당한 판단이 아닌 바탕으로 남 탓을 하거나, 불필요하게 자책하는 것, 할 수 없을 거라고 타인과 자신에게 끊임없이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것, 다 부질없다 여기며, 삶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 그 모든 말에는 삶을 공허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어 삶의 방향을 틀어버리거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힘이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조심히 한다. 그리고 말이 되기 전에 생각에서부터 더 조심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습게도 타인에게는 잘하는데, 자신에게는 잘 되지 않는다. 언제나 후순위로 자신을 둔다. 안다. 왜 잘 안되는지, 덜 시급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많은 문제들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잘 안다.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은 삶은 충전이 되지 않은 간당간당한 핸드폰을 쥐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을. 언젠가 온전한 언령을 나 자신에게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될 수 있다면, 세상의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시 그 세상은 지금과 다르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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