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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람 Feb 13. 2024

원해서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 무엇도.

《킨(KINDRED)》(옥타비아 버틀러, 비체, 2016)


1976년 6월 9일. 다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약혼자 케빈과 동거를 시작하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그 일은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에 일어났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 시야가 어지럽다가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다나는 낯선 곳에 와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진 강에 한 아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다나는 아이를 건져 올려 살려낸다. 그런데 아이의 엄마는 고맙다는 인사는 커녕 손으로 다나를 내리쳤다. 아빠는 장총으로 다나를 겨누어 위협한다. 그 순간, 다나는 다시 현기증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한 아이가 방 안의 커튼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다나는 불을 끄고 아이를 위험에서 구해낸다. 그리고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킨 자신이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를 알아낸다.


1815년 어느 날. 한 세기를 건너 과거로 타임슬립한 것이었다.


1815년의 미국 남부 지방. 흑인이 백인의 노예인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 ‘흑인’이자 ‘여성’인 다나에게는 끔찍한 시절이 아닐 수 없는 시대.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나가 구해낸 아이, ‘백인’ 루퍼스는 흑인 노예 농장주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다나의 조상(KINDRED, 일가친척)이기도 했다.


총 6번의 타임슬립. 흑인이자 여성인 다나에게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시절로의 시간여행은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일어났으며,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다. 그 시절 미국 남부에 존재했던 인권 말살 피라미드의 최하층의 삶을, 몸소.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며 인종차별이 금기시 된 다나의 눈에 1800년대의 실상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이제 계집입니다.” 나뭇등걸에 선 소년이 외쳤다. 소년은 약간 뒤에 선 소녀를 가리켰다. “요리도 하고 빨래도 하고 다림질도 합니다. 이리 와봐라. 여러분에게 모습을 보여드려.” 소년은 소녀를 옆으로 끌어내고 말을 이었다. “젊고 튼튼합니다. 값이 꽤 나갑죠. 200달러 되겠습니다. 누가 200달러 부르시겠습니까?” 
소녀가 소년을 돌아보고 항의했다. “난 200달러보다는 더 나가, 새미! 마사는 500달러에 팔았잖아!”
“닥치고 있어. 넌 아무 말도 하면 안 돼. 주인님이 엄마랑 나를 샀을 때 우린 아무 말도 안 했어.”


흑인 아이들은 노예시장에서 벌어지는 혐오스러운 일을 ‘놀이’ 삼아 놀았다.

밭일을 흉내내며 놀기도 했다. 백인 아이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놀이가 흑인 아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살아 왔으며, 그것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놀이’가 흑인 아이들에게 닥칠 미래를 대비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나는 구역질 날 정도로 이 현실이 역겨웠다. 그러나 다나의 타임슬립에 휘말린 약혼자, ‘백인’ 케빈에게는 그저 ‘어른들이 하는 일을 생각없이 흉내낼 뿐’인 것으로 비쳤다.


“다나, 아이들의 놀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고 있어.”
“그리고 당신은 너무 적게 두고 있지.”


다나에게는 남일이 아니었다. ‘흑인들’에게는 남일일 수 없는 것이었다. 케빈은 ‘백인’이기에 다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고, 다나는 이 세계가 백인인 약혼자 케빈에게 끼칠 영향을 걱정하게 된다.

언젠가는 흑인들에게도 자유가 주어질 것이다. 다나처럼. 다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역사를 알고 있으며, 그 산 증인이 다나 자신이기에.


그러나 그 시기가 조금 더 빨라지기를 바랐다. 노예 신분으로 묶여있는 흑인 모두에게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조상인 백인 루퍼스의 노예들만큼은.

조상 루퍼스만큼은, 다르기를 바랐다. 그래서 루퍼스가 죽을 위기에 놓여 과거로 끌려 들어갈 때마다 그를 살려냈다.

그는 과연 바뀔 수 있을까.

다나는 루퍼스를 살려주는 은혜에 대한 대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옥타비아 버틀러의 SF소설 <킨>(작가는 킨이 SF가 아닌 판타지라고 말하지만 SF로 분류되고 있다.)을 알게 된 것은 OTT 서비스인 디즈니플러스의 드라마를 통해서였다. 총8화로 이루어진 동명의 드라마였는데, 8화가 내용의 끝이 아니었다.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관련 내용을 검색하다가 원작이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게 되었다. (드라마의 배경은 2016년, 소설의 배경은 1976년이다. 1979년 발매 소설.)


흑인이자 여성인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자신과 똑 닮은 주인공 ‘다나’를 통해 그 시절 인종차별의 실상을 보여준다. 흑인 해방 운동가였던 젊은 흑인 학생이 조상들이 백인들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는 치욕스러운 모습을 경멸하는 것을 보고 이 소설을 기획했다고 한다.


‘저 학생이 그 시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자유를 아는 다나는 그 시대에 저항한다. 저항 하려고 한다. 하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백인들의 폭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제 몸으로 받아낼 수밖에 없는 흑인은 아픔이 두렵다. 아픔을 이기고 반항하다가는 죽음밖에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도 없다. 공포에 치를 떨며 순응을 선택하는 다나를 독자는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나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케빈이 백인이라는 이유로 당하지 않는 일들을 보며 ‘인종차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했다. ‘인권’에 대한 것도.


반면 다른 생각도 들었다. 과연 지금이, 그때와 다를까.


폭력은 아주 많이 줄어들었을지도 모른다. 폭력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도,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폭력이 행해지고 있음을 우리는 뉴스를 통해 보고는 한다. 물론 밝혀지면 처벌을 받는다. 타인을 향한 폭력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그러나 무력으로 굴복 당해 신고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복종은 어떤가. 복종하는 이유는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 앞에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이들이.


비겁하게 보이지만 과연 그들만의 문제일까.


당하는 이들이 원해서 일어난 일은 없었다. 그 무엇도.


다나는 원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인들도 원하지 않는다. 원한 것은 그 시절의 ‘백인’ 이며, 어떤 시절의 ‘남자’이며, 지금 돈과 권력을 가진 ‘누군가’. 그러니까 일부 뿐이다.


그러나 나아지고 있다. ‘인권’에 대한 인식은 눈에 띠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 왔다. 그리고 변해갈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믿는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지기를. 지금 고통받는 이들이 내일 덜 아플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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