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일.
새해 첫 날 부터 머리를 움켜쥐고 침대에서 뒹굴고 있다. 송년회, 신년회, 동창모임, 고객접대, 친구모임 등으로 내 몸은 기어코 녹초가 되었다.
매일 저녁이 술이었다.
술.
술.
또 술...
상승하는 간 수치와 그로 인한 피로감, 쓰린 속, 숙취로 인한 고된 오전 업무, 기억력 감퇴. 가장 무서웠던건 밀폐된 공간에서, 혹은 막막한 순간에서, 피로감과 함께 시도 때도 없이 찾아 오는 공황 증세였다.
공황 증세는 사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는 호흡 곤란이 찾아오고, 누군가는 현기증이나 빈혈을 경험한다. 누군가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누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거나, 집에 불이 났다고 착각하는 정신 착란 형태를 보이기도 하는데, 이 때 '살기 위해' 집 밖으로 뛰어 내리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내가 겪은 공황 증세는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는 현상이었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 심장이 마치 전력질주를 했을 때 처럼 갑자기 빨리 뛰는 것이다. 지금 당장 심장이 멈출 것 같은 미칠듯한 공포감이 들다가 이내 잦아 들었다. 가장 무서운건 예측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증세가 나타날 것 같은 불안감 이었다.
2020년 1월 3일.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심장 전문의를 찾았다. 피검사와 심박도 검사를 모두 마치고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그 결과는 충격이었다.
"심장이 너무나 건강하게 잘 뛰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지만 그것은 실제 심장이 문제가 있어서가 아닌 내 머릿속의 뇌가 만들어낸 '착각' 과 그로인한 '공포'였다. 불행인건가, 다행인건가? 실제 내 심장은 너무나 건강했다. 의사 선생님은 공황과 뇌손상 가능성을 언급 하시며, 우선 술과 카페인을 줄여보고 그래도 심장이 문제가 있다고 느끼면 빨리 다시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2020년 1월 4일.
내가 처음으로 술 없는 인생을 선택했던 역사적인 날이다. 그로부터 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고, 공황은 싹 씻은듯이 사라졌다. 2025년 8월, 나는 여전히 입에 술을 한 방울도 대지 않고 있다. 예전보다 더욱 혈기 왕성하게 일에 매진하고, 경제 활동을 하고, 독서와 골프를 즐기며 새로운 인생을 사는 중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술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황 증세가 멈추고 다시 몸이 괜찮아지면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런데 술을 마시지 않는 날이 하루, 하루 차곡차곡 쌓여 갈수록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술 없는 세상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술로 가득하다. TV, 유튜브, 드라마, 블로그, 영화, 회사, 친구들, 맛집, 먹방, 모든 사람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술을 마신다. 세상은 술에 참 관대하다. 아홉시 뉴스에는 음주운전 으로 인해 망가진 가정과 망가진 운전자의 삶을 조명하다가, 뉴스가 끝난 10시에는 맛있는 먹방이 방영된다. 맛있는 밥과 한 잔의 술은 기쁨이고, 인생의 낙이며, 때론 보약이라고 한다. 세상을 둘러싼 이런 프레임은 술에 중독된 자신이 매우 정상적이라는 변명거리를 만들어 주기에 아주 좋다. 그야말로 착각이다.
인생은 한 번 뿐이며, '한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철학적인 차원의 사고를 요한다. 술을 마시는 건 본인의 자유이고, 각자의 책임이며, 술을 즐기며 살아가는 삶 또한 존중 받아야 한다. 술을 마시는 사람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없음을 밝힌다. 그러나 술 없는 세상을 선택하는 사람의 삶도 꽤 멋지고 그럴듯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앞으로 이 곳에 와서 덤덤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