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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구름 Jul 19. 2023

나의 선생님

교단일기 18

나도 지금까지 23년간 아이들을 가르쳐온 초등교사이지만 나에게도 좋은 선생님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선생님이란 직업을 부끄럽지 않게 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먼저 나의 선생님은 나의 부모님이 아닐까 싶다.  내가 어릴때 당시 안 어렵게 살았던 집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우리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고향인 충남 보령에서 사시다가 중, 고등학생때 서울로 상경하여 어려운 고학생을 시기를 보내고 아버지는 단국대학교를 다니시면서 한국일보라는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하셨다.  어머니도 일을 하시는 외조부모님 대신 7남매의 둘째이자 장녀로 태어나 아래로 여섯명의 동생들을 돌보며 억척같이 사시면서도 일과 학업을 병행하여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신 그 당시 배울수 있는 기회를 위해 노력하셨던 분이셨다.  두분이 결혼을 하시고 어려운 가운데 새 살림을 하시며 형과 나 두 형제를 낳고 잘 길러 주셨다.  아버지는 신문사 광고국에서 일하시면서 일주일 중 6일을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새벽에 퇴근하시는 일과를 보내셨다.  최근 주 69시간 근무며 말들이 많지만 아마도 그당시는 매일 18시간씩 6일을 일하는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빡센 근로 환경이셨던 것 같기도 하다.  광고국의 특성상 거래처와의 회식자리나 단체에서의 회식자리가 많았기도 했었으니 그랬겠지만 요즘 한달에 한번 먹을까 말까한 회식자리에서 소주 몇잔만 마셔도 다음날 피곤한데 그 당시 아버지는 어떻게 견뎌내셨는지가 궁금하다.  그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내가 어렸을때에는 하루에 담배를 두갑씩 피셨다고 한다. 어렴풋이 형과 내가 아버지 금연 포스터를 만들어서 아버지 담배 넣어놓는 서랍에 붙여놓았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스트레스와 피곤을 이겨내시려고 피웠던 담배도 첫째 손녀이자 내 딸이 태어나서 돌봐주시면서 딱 끊으셨으니 손녀 사랑도 대단하셨던 것 같다.  30년넘게 피던 담배를 한 순간 끊어버리셨으니 독하게 맘 먹고도 다시 담배를 피우는 중독이 심하셨을텐데 결단을 하시고는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 당시 피웠던 담배 때문이었을까 좋지 않았던 폐에 암이 발견되었고 결국 암 치료를 받으셨지만 안타깝게 너무 빨리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좋은 남편은 아니었을 수 있지만 우리 형제에게는 좋은 아버지였다.  우스갯소리로 아버지의 무관심과 어머니의 정보력이 합쳐져야 자녀들이 성공한다는 말처럼  그 당시 아버지는 일로 바쁘시기도 하였지만 우리 형제의 공부나 학업에 한마디 간섭이 없으셨다.  

그 흔한 잔소리 한마디를 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당신의 일을 열심히 하셨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큰 부담을 갖지 않고 스스로 열심히 해서 형님은 한양대학교 공대를 나와 지금까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중국을 오가며 열심히 살고 있고, 나는 열심히 아이들 가르치고 교감 승진을 앞두고 있다.   

 아버지의 일자리를 방문해 보진 않았지만 신문사를 다니셨기에 어렸을때부터 아침에 집으로 배달되는 신문을 항상 보면서 자랐고 그 덕에 국어공부도 잘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당시는 신문의 재미를 그리 잘 알지 못했지만 신문의 만화며, 그날의 티비 프로그램이며, 사진을 보며 나름대로 융합적인 공부를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그 당시 신문에는 한자를 많이 사용하던 시기여서 어머니가 일일 한자 공부 같은 것을 시켜주기도 하셨다.  그래서 중, 고등학교때 한자는 다른 친구들보다 잘 할 수 있었고 국어 실력도 나름 괜찮았던 것 같다.  


 어머니는 여러 형제 중 장녀로 태어나신 덕에 억센 남동생들을 업고, 달래고 키우다 시피 살았기에 군기반장으로 살아오셨던 분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칠순이 넘은 외삼촌들을 만나시면 큰소리로 혼내시기도 하는 어머니시지만 우리 형제들에게는 항상 집에서 우리 두 형제를 돌보아 주시고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게 지원해주신 분이시다.   그 당시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시집살이도 하시고, 매일 아침출근해서 새벽 퇴근 하시는 아버지 뒷바라지며, 아들 둘의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바쁘게 사셨던 어머니는 우리들을 위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회, 녹색어머니회, 학교육성회 등 학교 단체도 열심히 하셨다.  그 당시 엄마가 학교에 오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는데 가끔 녹색어머니 활동을 하시는 어머니를 보고 자랑스러워 하던 생각도 난다.  특히 연년생이었던 형님은 공부를 아주 잘 했어서 학교에서도 존재감이 있었는데 (나도 못한 건 아니지만 형의 그늘에 가려 조금 덜 관심을 받았음 )그 점이 어머니를 열심히 살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하신 것 같다.  중학교를  지나 그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에 형과 나는 진학을 했는데 형은 당시 뺑뺑이에 새롭게 개교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해 전교 석차에 들어가는 성적이었음에도 진학지도 경험이 부족했던 학교 때문에  졸업한 해 진학한 학교를 휴학하고 지금말로 반수를 해서 한양대 공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나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앞에 진학지도를 받았던 교대 지망생 동창때문에 펼쳐져 있던 교대 진학자료 덕에 경인교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때는 급식이란 것이 제도화 되어 있지 않아서 중학교때부터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었다.  고등학교때는 형과 내가 같이 야간 자율학습등으로 도시락을 두개씩 싸가지고 다녔으니 어머니도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대학 진학하고 나서 도시락 싸지 않으니 너무 살겠다고 하신 기억이 난다.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가족들의 아침 식사와 도시락까지 준비하셨던 어머니가 계시기에 잘 먹고 잘 공부하여 이만큼 잘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아버지, 어머니의 희생과 고생이 있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좋은 사람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초등학교때에는 공부도 곧 잘 하면서 운동을 잘 하는 아이였다.  지금은 과체중으로 상당히 망가져 있지만 초등학교때는 몸도 날쌔고, 운동신경이 좋아서 학교 계주선수로 뛰거나 운동회때 7,8명씩 뛰는 개인 달리기에서도 늘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 당시 그런 기억이 나의 자존감을 많이 높여주는 계기가 되었고 한가지를 잘 하는 것이 있을때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초등학교때는 공부로 탑은 아니었지만 내 기억에 창의적인 질문을 많이 하던 아이였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4학년 통지표에 ‘두뇌는 좋으나 산만한 편임’이라는 선생님의 애정어린 가정통신도 씌여 있다. 


 초등학교때 선생님들은 지금 생각하면 말 그래도 철인이었던 것 같다. 한반에 못해도 60명 넘게 있었던 학급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죽어도 못할 것 같은 그 일들을 그 당시 선생님들은 해 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체벌의 기억도 함께 존재한다.  나 역시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사랑의 매를 맞으며 컸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어찌보면 60명의 에너지 넘치는 초딩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생각도 든다.  

 하여튼 그당시 내 기억의 선생님들은 1학년때는 왜 그리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울었는지 학교가서 엄마 보고 싶다고 울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 종합장에 자음과 모음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적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유치원을 정식 졸업은 하지 못하고 중도 자퇴를 하고 집에서 기본적인 한글을 배우고 학교에 간 것 같은데 다행히도 한글을 빨리 깨우치고 책도 잘 읽고 쓰기도 금방 배웠던 것 같다.  그 당시 교과서는 누런 갱지에 좌우로 길었던 옛날 교과서 였던 기억이 나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옛날 이야기인 것 같아  반 백살인 내 나이가 새삼 부끄럽다.

 하여튼 1학년은 나이가 있으신 어머니 같은 선생님이셨는데 엄마보고 싶어하는 나를 포함한 많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주셨다.  

 2학년때는 무서운 남자선생님이셨는데 얼굴이 잘생겨서 기억이 난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새롭게 학교가 개교하면서 학구 개편이 되며 전학을 가게된 학교에서는 다정한 3학년 선생님을 만나 배움도 즐겁고 실력도 키우는 시기가 되었던 것 같다. 4학년때는 전교에서 제일 무섭다는 남자 선생님을 만나 친구들이 뺨싸대기를 맞으며 창문에서 부터 복도 문까지 날아가는 진귀한 장면도 보며 지냈던 기억이 있다.  그 분은 그당시 왜 그리 애들을 때렸을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너무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귀에 인이 박히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5학년, 6학년은 젊은 여자 선생님을 만나 귀여움도 받고 가끔은 선생님 집에 놀러도 갔던 기억이 난다.  떡볶이도 얻어 먹고 선생님집에서 친구들과 게임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도 힘이 들었던 건지,  교무실에서 혼나고 오셨는지 가끔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나였으면 더 힘들어 했을 수 있겠지.   마지막 졸업때까지 그래도 우등상과 개근상을 받도록 응원해 준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렇게 나는 서울의 공연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생활에서 생각나는 것은 학교가 무척 북적이고 친구가 많았다는 것이고 선생님들은 무섭기도 했지만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미디어라고는 졸업할때 쯤 교실 칠판 위에 한대설치된 24인치 흑백 브라운관 티비였으니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배움이요, 책이 되었던 것 같다.


 중학교때는 자유롭고 새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교과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국민학교때 공부를 잘 한 편이었기에 중학교에서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새롭게 배우는 영어와 어려워 지는 수학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중학교 선생님들은 무척 무섭고 체벌이 일상이었다.  그 당시 선생님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체벌을 하셨는데 손바닥 때리기는 기본이고 책상위에 올라가 허벅지 빗자루로 때리기, 그렛나루 당기기,  발바닥 때리기,  엉덩이 때리기, 허벅지 때리기 등등 다양한 폭력상황에서 견뎌내는 법을 배웠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때 맷집도 다들 길러진 시기였어서 왠만한 폭력에는 약간 무뎌지는 부작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몇몇의 선생님들은 인간적으로 대해주기도 하고 칭찬의 말도 해 주셨는데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 그런 말들과 칭찬이 정말 고맙기도 하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하루는 교무실에 국어선생님이 호출을 한다고 해서 갔더니 

 “교실에서 수업할때 이상한 소리를 많이 하길래 공부를 못하는 줄 알았더니 국어 시험을 잘보았더라.  머리가 좋은 것 같은데 더 열심히 잘 해라”라는 칭찬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걸까?  그래서 국어공부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또 영어는 그 당시 왜 그리 다이알로그를 외웠어야 했는지 머리에 도장을 찍듯 공부를 해도 안 외워지는 영어 문장때문에 힘들어 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영어 본문 전체를 외우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정말 한 문장도 빼지 않고 영어 본문을  다외워 칭찬 받았던 기억도 나고.  중학교때는 정말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한마리의 길 잃은 어린양처럼 폭력과 칭찬의 양 끝을 줄타기 했던 기억인 것 같다.


고등학교때는 선생님들이 자율적인 학생들로 학교 분위기를 만들었기에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들였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인문계 고등학교가 대개 그렇듯 아침 0교시부터 시작해서 저녁 먹고도 야간 자율학습을 11시까지 시켰던 학교에 별보며 학교 등교하고 별보면서 하교하는 3년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이 당시는 선생님들의 개성이 뚜렸해서 진짜 무서운 선생님,  한 없이 평화로운 선생님, 기인 정도의 희한한 선생님등 선생님의 다양성을 배운 시기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2학년때 고교 전과정을 다 배우고 3학년때는 입시 준비에만 일년을 보내던 그 당시에는 선생님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대입 공부를 스스로 하는 법을 익히는 시기였던 것 같다.  중학교때는 별볼일 없는 실력의 나였지만 그래도 고등학교때 정신이 들었는지 열심히 해서 가장 좋은 성적을 낸 것도 고등학교때였던 것 같다.   매일 매일 문제집을 책상 한켠에 쌓아두고 문제를 열심히 풀었던 그 당시로 돌아가라면 차라리 군대를 다시 가겠다. 


 그래도 진학상담을 하면서 나의 진로를 정해준 고3때 담임선생님은 무척 근엄하면서도 카리스마 있으신 분이었는데 나중에 교감, 교장도 하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자신처럼 교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권유해 주셨으니 나도 착한 학생, 준비된 선생님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대학때도 여러 교수님들이 좋은 가르침을 많이 주셨지만 죄송하게도 대학때 배웠던 것들이 지금 내 머리속에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오히려 학군단 생활을 하면서 직업군인으로 교관을 하셨던 훈육관님들이 더 생각이 많이 난다. 솔선수범과 군인으로서의 자세와 자부심을 일깨워 주셨던 훈육관님들 중 한분은 좋지 않은 출신임에도 장군까지 되시는 등 훌륭한 군인이 되시기도 하였다. 대령계급의 연대장으로 이천에 근무하실때 찾아뵙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렇게 자녀의 삶에 희생하신 부모님과 학창시절 많은 가르침을 주신 나의 선생님들 덕에 나도 조금씩 좋은 선생님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스승의 은혜, 하늘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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