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그 미친 희망
빼빼할머니가 사는 골목 입구에 마늘할머니가 살았다. 마늘할머니는 마늘을 까서 생계를 이어가 그렇게 불렀다.
마늘할머니는 인천에서 태어나 장봉도로 시집갔다. 농사도 짓고, 배도 부리고, 나무도 하러 다녔다. 인천으로 나와 호떡 장사, 옥수수 장사, 고동, 번데기, 뻥튀기를 서울 노량진에서 받아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팔았다. 자식들 가르치며 사느라 부지런히 일했지만 남은 것은 몸뚱이뿐이다. 2년마다 계약 기간이 끝나는 전셋집으로 이사를 다닌다. 수십 번 이사 다녀도 할머니는 작은 자투리 땅에 작물을 심어 이웃들과 나눈다. 천막을 씌운 지붕에는 어김없이 호박과 박이 주렁주렁 열린다. 가을이면 이웃들과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
‘나이가 들었으니 놀아야 하는데 놀면 심심하고 마치 미친 사람 같다’며 ‘마늘 까는 일이라도 하면 세금 걱정 안 하고 애들이 안 줘도 먹고 산다’고 말한다. 간혹 어쩌다 일이 없을 때면 마늘할머니는 뒷짐을 지고 동네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오히려 그 모습이 낯설다. 한시도 쉬지 않고 밭에 물을 주고, 집 앞을 청소하고, 호박을 적당한 두께로 썰어 소쿠리에 담아 지붕 위에 말리던 할머니다. 일거리가 떨어진 것은 아닐까 슬그머니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마늘할머니가 거주하는 집에 들어서면 널찍한 마루에 온통 비닐로 덮여있다. 마늘을 까기 위한 용도의 비닐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아주기도 한다. 한편에는 연탄이 쌓여있고 그 옆으로는 박스 등이 잡다하게 놓여있다. 알고 지내던 분들이 종종 재활용되는 것들을 직접 가져다준다. 잘 모아서 고물상에 판다. 마루와 이어지는 주방으로 들어가면 양쪽으로 방이 있다. 한쪽 방은 장롱이, 옆 방에는 물건들이 박스에 그대로 쌓여있다. 언제라도 이사할 준비를 하고 산다. ‘내년에도 여기 살게 되면 고추 말려야지’라고 말하던 할머니는 다음 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3년 뒤에 작고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늦가을이었다. 마늘할머니는 지붕 위 호박 수확을 도와달라고 했다. 사다리를 가져와 지붕 위로 겁 없이 올라갔다. 몸무게가 가장 가벼운 사람이라는 이유였다. 내 머리 크기 두 배가 넘는 호박이 수두룩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하기라고 한 것처럼 호박을 손에 쥐고 머리 위로 들어 올려 보였다. 마늘할머니는 연신 위험하다며 조심하라고 손을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 수확해 보는 호박에 나는 신났다. 호박을 이웃들에게 하나씩 나눠드리고 내친김에 할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작은 톱을 가져왔다. 예쁘게 반으로 갈라 속은 먹고 모양 그대로 말려 박을 만든다고 했다. 나와 작업자들은 신나게 호박을 잘랐다. 마치 흥부가 된 것처럼 말이다.
빼빼할머니와 마늘할머니와의 인터뷰는 작정하고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공공예술프로젝트를 하면서 늘 동네에서 만났던 할머니들이었다. 그 동네에서 처음으로 반바지를 입었던 반바지 할머니, 작업자들에게 농사를 가르쳐주신 농사샘 할머니, 키가 작고 몸집도 작은 쬐끄만 할머니 등 동네 할머니들은 마실 장소가 없어 도로 한 편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평상을 만들어 드리겠다고 하니 노숙자들이 모여서 안 된다고 한다. 불편해도 차라리 이편이 낫다고 했다.
가끔은 할머니들 주변으로 비둘기들이 모이곤 했다. 할머니 중 한 분이 쌀알을 줬기 때문이다. ‘난 별로 안 먹고 싶으니 많이 먹고 너희들이나 살 폭폭 쪄라’고 말했다. 그저 옆에 가만히 앉아 할머니들 이야기를 듣고, 물어보는 말에 답을 하면서 맞장구치면 할머니들의 영역에 포함시켜 줬다. 애초부터 목적을 가지고 만난 것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럽게 인터뷰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할아버지들과의 만남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자주 보던 할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다. 그도 아니면 낯선 이들에 대한 경계심이 할머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유는 좀 더 지나 알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무르익지 않았고, 나의 내면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동네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글쓰기의 품성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