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리 Jan 13. 2024

슬픈 기억이 슬프지 않게

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나에게 슬픈 일은 애인과의 이별도 아니고, 라면 사리 없는 떡볶이를 먹을 때도 아니다. 내가 나로서 인정받지 못할 때 나는 슬프다. 표독스럽지도 못하고, 아득바득 따지지도 못하며, 그 상황에 대해 쟁쟁거리며 투정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저 소심하게 울음을 삭히며 그 공간과 조직을 빠져나온다. 그런 나를 두고 언니는 혼자 잘난 척 다하면서 제 잇속 챙기지 못하는 놈, 이라고 말한다. 


슬프지만 차마 슬프다고 말하는 일조차 사치가 될 것 같은 일들이 있다. 일본 간토학살 이야기를 전해 듣던 날이 내게는 그랬다. 


1923년은 일본에서 간토대지진이 일어난 해다. 더불어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 날이기도 하다.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안에서 진도 7.9의 지진이 발생했다. 건물 붕괴와 화재 등 지진으로 인한 피해자는 약 10만 여 명에 달했다. 지진 직후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며, 부녀자를 겁탈하고, 천황을 죽이기 위해 폭탄을 들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9월 2일 계엄령을 시행했다. 2일 새롭게 구성된 내각에서는 조선인을 내란 주동자로 내몰아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을 무자비하게 죽이기 시작했다. 조선인 6000여 명과 민간인, 중국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어 나갔다. 


기억과 평화 사회적 협동조합 김종수 이사를 만나러 갔다. 사무실이 위치한 곳은 산속이었다. 그저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대로 경차를 몰고 가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마치 동화 속 마법의 성을 찾아가는 길 같았다. 에스자로 구부러진 가파른 경사길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액셀을 밟고 있는 오른발이 떨렸다. 다행히 마주 오는 차량 한 번 만나지 않고 무사히 평지에 도착했다. 


처음 만나는 김종수 이사에게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김종수 이사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명함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무엇부터 이야기할까요,라고 말하는 김종수 이사를 보며 인터뷰이에 대한 신뢰감이 무한정 생겼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중에 5.18 광주 사건을 들었다. 다음 해 다니던 교회에서 영화 택시에 나오는 한스 기자가 찍은 영상을 보게 되었다. 광주 사건의 진실을 보면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이후 조선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만 했던 간토학살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다시 한번 그때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2006년이었다.


이후 김종수 이사는 전시회, 심포지엄, 국회 토론회, 특별법 발의 등 간토학살에 대한 규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2023년은 간토학살 100주기가 되는 해다. 아직도 우리 정부는 그 어떤 추도식이나 추도문 한 번 발표한 적이 없다. 


교과서에는 잘 나오지 않는,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잊히고 은폐된 역사를 기억하는 일, 이념이 되었든 국적이 되었든 다름이 극단적이 되어 폭력화된 피해를 받은 역사를 기억하는 일, 고통받았던 그들의 기억을 계승하고 다시는 미래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좋은 기억도 있고 아픈 기억도 있다. 아픈 기억을 지워버리면 내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아픈 기억 속에서 성숙해 왔다. 사랑도 그렇고 사별의 기억도 그렇다.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들과 해야 하는 일을 비로소 알게 된다. 아픈 기억 때문에 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종수 이사는 죽은 자의 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회는 산 자의 인권도 지켜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제주와 광주의 학살, 세월호와 용산, 이태원까지 기억을 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 대해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은 그들의 마음에 귀 기울인다고 한다.  


김종수 이사와 인터뷰를 하며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이 일이 좋고, 해야만 하는 일이고, 가치로운 일이니까 한다고 말이다. 예기치 못한 재난에 의해, 외부의 강제력에 의해 원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그 어디에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펜을 드는 일밖에는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이라 믿는 것이다. 


덧붙여 기억과 평화 협동조합은 후원자도 많지 않고, 조직적인 인적자원도 부족하며, 돈 벌 계획이 뭐냐 물으면 없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글을 응원해 주는 사람도 별반 없고, 그것으로 많은 돈을 벌 계획도 없다. 그저 단지 듣고 쓸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주어는 여공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