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리 Jan 22. 2024

은밀한 다짐과 자기 위로

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지난겨울, 남동생에게 전화를 받았다. 허리가 아파 움직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웬만해서는 전화하는 일이 없는 동생이 오죽했으면 연락했을까 싶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한 나는 머리를 감겨주고, 양치를 할 수 있게 도와줬다. 조금이라도 일어날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래야 병원도 가고 반려묘도 챙겨줄 수 있다. 서둘러 등산 스틱을 사러 나갔다. 동생이 필요하다고 한 물품들까지 사니 한 보따리였다. 등산 스틱에 의지해 다음 날부터 동생은 집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스틱을 허리 앞춤에 대고 천천히 걷는 남동생의 뒷모습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똑같았다. 


뒷모습은 앞모습과 다르다. 말이 없고 표정이 없다. 신체의 움직임만 있다. 그럼에도 많은 말을 건넨다. 지쳐 보이기도 하고, 아파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신나 보이기도 하다. 차마 얼굴 표정에서 드러내지 못한 그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할머니의 뒷모습은 교조적이었다. 막 잠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뒷머리는 납작하게 눌려 있고, 눈에는 미처 떼지 못한 눈곱이 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허리와 구분되지 않는 푸짐한 엉덩이를 씰룩대며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밭에서 일렁거리는 푸르름과 한 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국민학교를 다닌 할머니는 오빠 등에 매달려 등교했다. 발이 시리다고 칭얼대는 할머니 발을 오빠는 자신의 주머니에 쏘옥 넣어주었다. 4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집에서 너무 멀었다. 여자는 할머니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다니다 말았다. 외동딸이었던 할머니는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스물네 살에 낯선 곳으로 시집오면서 눈물이 텀벙텀벙 났다고 한다. 친정이 그리워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아버지는 답장과 종이와 돈을 함께 보냈다. 너무 오래되어 새까매진 편지들은 얼마 전에 모두 버렸다.


친정에서 밭 한 번 매어보지 않았다. 시집오니 할 일이 지천이었다. 불 때서 가마솥에 밥을 하고, 방아를 찧어야 하고, 삼베도 짜야했다. 어느 겨울, 시아버지는 점심을 당분간 먹지 말자 했다. 할머니는 대들었다. 아침 많이 먹어야 점심 안 먹고, 점심 안 먹으니 저녁 많이 먹게 되니 계산해 보면 쌀이 더 들어간다고 했다. 시아버지는 ‘너 그렇게 바른 말 할래?’라고 꾸짖었다. 시아버지의 호령이니 그해 겨울 점심은 굶었다. 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껄끄러운 보리밥에 시퍼런 무청까지 모두 넣어 덤벙덤벙 담은 희멀건한 무김치가 전부인 밥상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겁나 맛있었는데 지금은 왜 맛이 없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서지간이었다. 다섯 명의 동서들은 어려운 일을 함께 해갔다. 할머니가 밭매며 눈물 한 방울, 호미에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흘리면 둘째 형님이 에구 눈물로 밭 다 젖겠다, 하며 대신 호미를 들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 없이 집안일하느라 고생한 큰 형님 생일이었다. 남편이 미역을 사 가지고 와 미역국을 끓이라고 했다. 둘째 형님이 찾아왔다. 큰 형님 생일상 차려줬다며? 오매, 형님도 질투할 줄 알아요? 이참에 우리 각자 생일날 밖에 나가자고 했다. 시아버지에게 혼은 났지만 동서들은 한복 곱게 차려입고 읍내에 갔다. 팥죽 한 그릇만 놓고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남자들은 여편네들이 몰려다닌다며 눈을 치켜떴다. 둘째 형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큰 형님이 몸이 아프면서 동서들 간의 나들이는 이어지지 못했다. 


할머니가 거주하는 집은 예전 시아버지가 주신 집이다. 논 400평, 밭 500평, 산 2000평을 줬다. 그 집에서 자식들을 키우고 여우살이 시켰다. 혼자 사는 할머니 집은 어수선했다. 자식들이 사다 준 영양제가 박스 채 굴러다녔다. 새로 사다 준 빨래건조대도 비닐이 벗겨지지 못한 채 벽에 기대어 있다. 어떻게 조립하는지 몰라서다. 비닐을 뜯어 조립해 드린다. 별거 아니네, 라며 할머니가 웃는다. 방바닥에 털퍼덕 앉으니 먼지도 함께 풀썩인다. 할머니가 손에 잡히는 대로 박스에서 음료수병을 꺼내 건넨다. 병을 따서 할머니에게 먼저 드렸다. 하두 많이 먹어서 별반 먹고 싶지 않다며 손을 젓는다. 냉큼 내 입으로 털어 넣는다. 


할머니는 이제 일이라면 지겨워하기 싫다고 한다. 냉이씨를 뿌리고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할머니가 시집온 뒤 얼마 안 있어 남편은 군대에 갔다. 혼자 남겨진 할머니는 나중에 죽을 때 봐야겠다 다짐하며 일기를 썼다. 아마 집구석 어딘가에 있을 텐데 찾지 못하겠다고 한다. 문득 ‘행복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박경리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일기는 내면의 은밀한 다짐이다. 글이 채 되지 못한 채 한 곳에 묶여있는 일기는 그래서 애처롭다. 행복과 불행, 슬픔과 기쁨, 상처와 외로움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처연하다. 그 모습을 응징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고 연필로 꾹꾹 눌러 담아 쓴다. 쓰는 행위는 그래서 자신에 대한 위로인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슬픈 기억이 슬프지 않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