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지 못한 말들-글쓰기 그 미친 희망
얼마 전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글을 쓰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딱히 도와줄 일이 없어 난감했다. 그녀가 집에서 밥 먹으며 이야기하자고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맞은편에 그네 의자가 보였다. 어느 때보다 투명하고 경쾌한 날씨였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마구 헤집어 놓을 즈음, 멀리 그녀의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종종걸음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훔치듯 바라보았다.
현관이 열려 있었다. 앞치마를 하고 방에서 나오는 그녀와 인사를 했다. 몇 번 온 적이 있었다. 나는 익숙하게 아일랜드 식탁에 앉았다. 그녀는 비빔국수를 먹자고 했다. 밀가루를 안 먹은 지 몇 년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 밥을 해주겠다며 서둘러 밥솥을 열었다. 괜찮다고 했지만 꼭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워커홀릭이다. 집에서 밥을 해 먹지 않는다. 어쩌다 먹을 때면 햇반에 3분 카레 정도다. 집안일에 관심도 없다. 그래도 청소는 한다. 쾌적한 환경에 거주하는 일은 중요하니까. 그러던 그녀가 밥 먹는 행위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상사로부터 지청구를 들은 어느 날, 집에서 두 시간을 멍 때리고 있었다. 문득 허기가 졌다. 냉장고를 뒤져 얼린 돼지고기와 김치를 꺼내 김치찌개를 끓였다. 하얀 김이 나는 밥과 얼큰한 찌개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한 시간 삼십 분이 걸려 완성한 김치찌개 한 상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상사에게 들은 지청구는 이미 희미해졌다.
나는 거의 집밥을 먹는다. 일을 할 때도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편이다. 외식업자가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조미료 가득한 음식이나 맵단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집밥을 먹으면서부터 입맛이 조금씩 변했다. 그런 나에게 밥은 위로가 아니라 의무다. 나를 건강하게 먹여 살려줄 자양분인 셈이다. 당연히 음식으로부터 어떠한 위로도 받지 않는다. 술이라면 모를까.
그녀 자신은 음식으로부터 받은 치유의 경험을 글로 쓰고 싶다고 했다. 덧붙여 육십부터 글을 쓰려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해야겠다고 한다. 자신의 일을 조금 줄이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 기록을 남겨야겠다며 글을 쓰는 데 용기가 필요한지 몰랐다고 말한다. 그녀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보였다.
문득 장강명 작가의 『미세 좌절의 시대』(문학동네, 2024) 중 ‘공인이 되는 훈련’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글을 잘 쓰는 데 있어서 논리력이나 어휘력보다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쓴 글을 나를 모르는 많은 사람 앞에, 사회에 내보이겠다는 각오다. 글을 쓰려면 결연해져야 한다.
나는 일단 쓰라고 했다. 무엇보다 끝까지 쓰라고 했다. 엉덩이 근육을 키우며 마지막 정거장까지 가는 일은 이외로 쉽지 않다. 창밖으로 유혹하는 화창한 날씨, 휴대전화에서 카톡거리는 각종 알람, SNS 계정에 쉼 없이 올라오는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다 보면 어느새 ‘나는 누구? 이 글은 뭐지?’라는 블랙홀에 빠지고 만다.
무엇보다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가의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화려하게 포장된 수식어는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담담하게 써 내려갈 때 슬픔이 슬픔을 위로하는 순간을 맛보기도 한다.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는 말한다. ‘글을 쓴다고 치유되는 건 아니지만 글을 쓸 때만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날 저녁의 불편함』은 세 살 때 오빠를 잃은 경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불편함과 슬픔을 묻어두지 않는 일, 이를 직시하고 성찰하는 일, 그래서 글을 쓰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