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대 엄마들이 모여 글쓰기 모임을 한다고 했다. 첫 시작은 두 명이었다. 온라인으로 엄마들을 모집했고 일부는 중간에 그만두었다. 올해 다시 엄마를 모집했다. 4명이 신청했다. 워킹맘도 있고, 양육만 하는 엄마도 있다. 모두가 시간 맞춰 한 장소에 모이기 쉽지 않았다. 온라인에 글을 업로드하고 줌으로 얼굴 인사를 했다. 초반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분 글쓰기로 시작했다. 글감은 모임 대표와 카페 운영자가 정하고 다른 멤버의 의견을 받기도 한다. 현재는 50일 동안 주말 글쓰기를 운영한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짧은 글의 형태로 카페에 업로드한다.
카페 운영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엄마 글쓰기 모임이 동아리 사업 지원을 받게 되었는데 글쓰기에 대한 지도를 부탁한다고 말이다. 3회 차밖에 되지 않아 송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엄마들의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꾸준함에 선뜻하겠다고 했다.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글을 쓴다는 일은 엄마로서가 아닌 나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육아와 일상에 파묻혀 나를 꺼내보기도 힘든 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글은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엄마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5명의 엄마들이 테이블에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았다. 어색함을 느낄 사이도 없이 엄마들은 어제 만난 사람처럼 나를 반겨주었다. 오프라인에서 엄마들이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온라인에서 글로만 만난 엄마들은 돌아가는 자기소개에 별거 아닌 일에도 서로를 격려했다. 때로는 박수를 치고, 그럴 수 있어,라는 말로 응수했다. 자신의 감정을 글로 남기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다는 엄마, 평가받는 느낌이 아니어서 좋다는 엄마, 글을 쓰면서 주제에 대해 들여다보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엄마, 꾸준히 한다는 것에 의미를 찾는다는 엄마, 깊이 있게 살펴보고 글을 써 보는 재미가 있다는 엄마들이다. 한 엄마가 물었다.
“작가님 책을 보니 생각한 것과 다른데요? 책만 봐서는 뭔가 시니컬할 것 같고, 우울할 것 같은데 굉장히 활달하시고 명랑하시네요?”
북토크에서 독자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 글을 쓸 때 나는 우울했다. 당시 감정으로 들어가야 했으니까. 이성복 시인은 『무한화서』(문학과 지성사, 2015)에서 이렇게 말한다.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세요.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데서 찾아보세요. 난간 끝으로, 뜨거운 물속으로, 자기를 밀어 넣어야 해요.
시인의 말을 믿고 나는 밑바닥까지 기어이 파헤치고 들어갔다. 너덜너덜한 감정의 조각을 한 땀 한 땀 이어갔다.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과 권태를 왔다 갔다 했다. 원고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그 글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보여주었고 선택과 판단은 독자에게 있었다.
첫 책을 준비하며 글을 썼던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부서지는 햇살 아래 노트북을 노려보던 나, 선풍기 바람에 노트북의 열기를 식히며 글을 쓰는 나, 빨간 노을인지 회색빛 노을인지 모른 채 하얀 화면을 응시하던 내가 있었다. 오로지 쓰는 행위만이 존재했던 시간이었다. 쓴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일 말이다.
하재영 작가의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라이프 앤 페이지, 2020.)에 이런 글이 있다.
쓰는 사람은 작가라고 불리는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다. 나의 서사를 나의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이는 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쓰기는 삶의 특정한 순간을 다시 한번 살아내기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뭉뚱그리지 않기, 외면하고 싶었던 고통, 분노, 슬픔, 상실, 결핍을 다시 한번 겪어내기. 그것은 나 자신의 이방인이 되는 일이다.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타인이 내리는 정의, 규정, 낙인을 거부할 수 있다. 내 안에는 나조차 알지 못하는 불가해하고 복잡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항변할 수 있다. 나는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대로 살고 싶다. 그러나 나의 이야기는 나에 대한, 나를 위한 개인적 기록만은 아니다. 자신 안에 갇히는 나르시시즘적 행위가 아니라 나의 삶을 해석하고 사유하기 위해, 그다음에는 스스로를 무한히 확대하고 다른 존재와 연결되기 위해 나는 쓰고 싶다. 자전적 이야기라도 그 안에는 사회나 시대, 타자와 관계된 무언가가 있다. 나는 내 이야기에서 다른 얼굴, 다른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기 바란다.
작가가 되고자 함이 아니라 작가로 살아가고자 한다.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과 세상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들뜨거나 서둘지 말 것, 기대거나 바라지 말 것, 다른 이를 가르치려 들지 말 것,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 것. 이것이 내가 최소한으로 지키고 싶은 작가로서의 태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