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모험가 Dec 07. 2021

토마스 하디의 '환상을 쫓는 여인'

아주 평범 씨의 책 이야기


 얼마 전 토마스 하디의 ‘환상을 쫓는 여인’을 읽었다. 요새 도서관에서 줌으로 고전 단편 읽기 독서토론을 하고 있는데 덕분에 고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거나 생소한 작품들도 많은데 짧지만 여운이 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나도 이 계기로 이 작품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의 간단한 줄거리는 엘라와 마치밀은 겉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세 아이와 부유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무기 제조업을 하는 현실적인 물질을 중요시하는 남편과 시를 좋아하고 환상을 즐기는 부인은 성향이 맞지 않았다. 아내는 그런 외로움을 필명을 쓰며 시인 활동을 했고 거기에 우연히 같은 주제로 작품이 실린 시인 트리위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던 중 여름휴가로 한 달을 살게 될 집을 빌리는데 마침 그 집이 트리위가 세를 살고 있던 집이었다. 그가 한 달 동안 비울 동안 그 집을 빌리게 된다. 엘라는 그를 만나고 싶지만 여러 번의 만남의 기회가 어그러진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후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남편 지인을 통해 시인을 집으로 초청하지만 그 또한 어긋난다. 그리고 다음날 신문에서 시인의 자살 기사를 읽는다. 시인 또한 환상의 여인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엘라는 자신이 그를 이해하는 여인이었는데 밝히지 못하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함을 탓한다. 렌트했던 집주인에게 그의 사진과 머리카락을 받고 그의 무덤에 가기까지 한다. 그녀는 넷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넷째를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후 죽고 만다. 후에 남편이 재혼을 해서 집을 정리하다 서랍에서 시인의 머리카락과 사진을 발견한다. 마침 넷째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는데 그를 보니 공교롭게 시인과 닮은 것이다. 남편은 시인과 부인과의 관계를 의심하고, 넷째 아이에게 “저리 가! 너는 나랑 상관없는 녀석이야”라고 하며 작품이 끝난다.

  

  작품에서 여주인공 엘라는 ‘존 아이비’라는 필명을 쓰며 시인 활동을 한다. 그것은 19세기 제한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의 삶을 대변해 준다. 그 당시 여성의 경제권은 없었고,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작가로서 경제적 활동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들은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목표였다. 엘라는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도 대부분의 여성들처럼 조건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이 작품을 보며 또 다른 작품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이 떠올랐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최근 2019년 여성 감독이자 배우인 그레타 거윅의 영화 ‘작은 아씨들’도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다. 작은 아씨들에서 둘째 딸 ‘조’가 익명으로 작가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며 그 당시 수많은 익명의 여성 작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부분에서 19세기 여성의 모습들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경제권이 없었던 여성들의 모습에서 이 조야 말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하디의 유명한 장편 ‘더버빌 가의 테스’와 다른 단편들은 이 작품보다 더 자극적이고 극적인 작품들이 많다. 마치 요즘의 막장 드라마 같은 소재들을 다룬 것을 보니 그 당시 매우 파격적이어서 신랄한 비판을 받은 것들이 이해가 되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극적인 소재에 흥미를 가지는 가 보다. 19세기 작품인데도 현대까지 아우르는 그의 작품들을 보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서 주인공 엘라가 소중한 현실을 잊고 환상만을 좇다가 결국 목숨까지 잃고, 넷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작품을 가지고 독서토론을 했는데 회원들이 현재의 배우자와의 관계를 많이 생각해보고 적용했는데 참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회원들이 오래 알게 된 사이가 아님에도 눈물을 흘리며 나누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과연 엘라는 트리위와 만났다면 행복했을까? 트리위와 잘 맞았을까? 대부분 사람들의 대답은 ‘아니오!’였다. 현실에서도 엘라와 마치밀의 관계처럼 너무 다른 부부의 모습들을 본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부딪치고 힘들어하기도 한다. 환상만을 쫒는 엘라와 트리위 이 두 사람이 만났다면 더욱 맞지 않고, 힘들었을 것 같다. 현실적인 마치밀이 오히려 알맞은 짝일 수도 있는데 이상형만 찾아다니고 현실을 회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부부가 서로 노력하지 않은 부분이 많이 아쉽다.


  또한 트리위의 유언에서 ‘만약 이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다정한 여성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살아갈 이유를 찾았을 것이다’라고 한 부분에 마음이 아팠다. 혹독한 비평으로 자살까지 했는데 오늘날의 SNS상의 악플(악성 댓글)이 떠올랐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말 한마디 댓글 하나도 다른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 또한 우리나라가 자살 1위라는 불명예가 있는데 우울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지 살피고, 누군가에게 따듯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이 작품과 인연이 되어 10월 28일에 낭독극을 공연하였다. 동네에 복합 문화카페가 있다. 그곳에서 마을 공동화 사업으로 구청에서 지원을 받아 여러 행사를 한다. 일 년에 한 번 ‘책 듣는 밤’이라는 낭독극 행사를 하는데 본인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다. 마침 극단을 운영하는 카페 주인이자 기획자분이 권유를 하셔서 참여하게 되었다. 대본부터 내레이션, 배경음악과 무대 PPT자료까지 모두 내가 하였다. 극 중 내레이션을 맡아 극을 주도하고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 배우들도 주민이자 극단에 소속된 아마추어 배우들이다. 먼저 소설을 대본으로 바꾸는 작업은 아마추어인 나에게 매우 어렵지만 재미있고 도전이 되는 작업이었다. 소설인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면서 전체 내용을 요약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었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일이었다. 평소 클래식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음악을 선정하는 작업도 즐거웠다. 처음 시작하는 장면에서는 경쾌한 느낌의 곡으로 바흐 프렐류드 No.1 in C major를, 엘라와 마치밀을 소개하기 전에는 인간극장 OST 비, 바람 1악장을 선곡했다. 심각한 이야기가 자칫 무거워질 수 있어 웃음 포인트로 선곡했는데 적중했다. 관객들은 이 음악이 나오자 웃음을 터뜨렸다. 시인이 유서를 읽는 대목에서는 포레 파반느 Op.50를 선곡했다. 슬픈 대목에서는 이 음악이 늘 생각이 난다. 지난 10월 28일 저녁 7시 동네의 복합 문화극장 카페인 카페 옴니버스에서 공연을 했다. 낭독극은 처음이었고 더구나 내가 대본을 쓰고 기획한 것은 처음이기에 더 떨렸다. 관객들과 소통하며 낭독극은 무사히 잘 마쳤다. 이후 관객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신 분들 중에는 나와 함께 도서관 독서토론 모임을 하는 분도 오셨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하나의 책을 읽고 당신은 그 책을 더욱 느끼고자 관련 장소를 찾아가신다고 한다. 관련 전시회가 있으면 전시회도 가셨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낭독극을 보고 독서의 행위 후에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업이라 느꼈고, 너무 좋았다고 하셨다. 배우분들의 명연기는 작품을 더욱 빛나게 했다. 이번 기회로 나는 책을 읽고,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고, 무대에서 공연을 하니 작품이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체화되었다.   

  

https://youtu.be/sDiFZFOH2dg


작가의 이전글 그리스 산토리니 어반 스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