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비전공자가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단도직입적으로 글을 쓰자면, 나는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디자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스페인어와 국제경영을 전공하고 첫 취업은 기획 업무를 맡았다.
그러다 디자인이라는 세계를 경험하고 '아 나는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생각한 것을 바로 어떠한 창작물로 구현해 낸다는 것에서 굉장한 매력을 느꼈다.
당연히 주변에 디자인을 하거나 배울 사람이 없었기에 처음에는 현직에 일하고 계시는 디자이너분을 알아내어서 과외를 받았다. 이 때는 정말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어떻게든 길을 찾았던 것 같다.(이때에는 지금처럼 비전공자를 위한 수업이나, 인터넷 강의는 전-혀 없었다ㅋ.. 지금 참 좋은 세상인 것 같다)
지금도 연락하는 과외선생님에게 열심히 디자인을 배우고, 블로그를 보며 툴을 익히고, 책을 사서 따라 하며 열심히 포트폴리오를 만들었고 처음으로 디자이너로 직장에 취업을 했다.
첫 직장은 호텔사업을 하는 곳으로 통합호텔사이트를 만드는 프로젝트에 채용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렇듯 호텔사이트를 만드는 것 외에도 각종 마케팅 디자인, 지류 디자인 등 디자인이 필요한 것은 뭐든 디자인을 하였다.
웹도 신입인데 지류 디자인 경험은 정말 하나도 없던 나로서는 을지로 인쇄 단지를 돌아다니며 사장님들께 하나하나 물어보고, 각종 책을 보며 인디자인을 배우고 지류 디자인을 했다.
첫 회사에 디자이너가 한 명이었기 때문에 여러 일을 맡으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것은 장점, 하지만 나 혼자였기에 지금 하고 있는 디자인이 괜찮은지, 맞는 것인지에 대한 피드백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아직 배울게 많은 신입인데, 누군가에게 배우지 못한다는 갈증이 컸다.
일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편집디자인 웹디자인 구분 없이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하고 있는 게 디자인이 맞는 건지, 나는 도대체 어떤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브랜드디자인인지, 편집디자이너인지, 콘텐츠 디자인인지에 대한 구별조차 하지 못하는 정말 비전공자 + 신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는데, 디자인을 정식적으로 배우지 않았는데 내가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디자인이 정말 맞는 건가?라는 끊임없는 질문과 자격지심이 나를 쫓아왔다. 모두가 나를 디자이너라고 부르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 타이틀 앞에 떳떳하지 못했다.
그래서 디자인 대학원에 진학 하기로 결심한다.
대학원을 가기 위해 지금까지 만든 디자인 물들을 모두 출력하여 입시 학원에 갔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디자인이 어떤 디자인인가요?를 정말 많이 물어봤던 것 같다. 제가 이런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디자인이라고 하는 건가요? 제가 어떤 걸 해야 대학원에 갈 수 있을까요? 어떤 과를 가야 할까요? 하는 원초적인 질문들을 정말 많이 했다.
지금에야 내가 했던 디자인이 마케팅 디자인이고, 편집디자인이고, 웹디자인이 고를 구별했지 그때는 정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바랐다.
명확하게 편집디자이너, 웹디자이너, 브랜드디자이너 와 같은 타이틀을 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미술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직장-학원-집을 반복했다.
그리고 지원했던 대학원에 모두 합격, 최종적으로는 이대 대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비전공자가 대학원을 들어갔을 때에는 다른 학생과 다르게 필수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 몇 개 더 있었는데 나는 그조차도 너무 좋았다. 내가 드디어 디자인을 제대로 배워보는구나 라는 생각에 대학원을 정말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디자인대학원 학비가 1학기에 거의 7,800만 원 정도였고 스스로 학비를 벌어야 했기에 이를 충당하기 위해 온라인쇼핑몰을 열고 프리랜서 플랫폼에 등록하여 외주도 정말 많이 맡아하였다. 온라인 쇼핑몰을 할 때에는 장사가 그래도 꽤 잘 되어서 자체제작 가방을 만들었다. 자체제작 상품을 만들기 위해 면목동에 가야 했기 때문에 회사인 문정에서 면목동 그리고 이대, 동대문까지 정말 하루에 서울 곳곳을 누비며 다녔다.
그리고 장학금이 학과 전체 1명에게 100만 원을 주는 구조였기 때문에 그 100만 원을 타기 위해서 적게는 하루 30분, 많게는 4시간 정도를 자며 과제, 시험준비를 하였다. 그렇게 2년 6개월을 보냈다.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는데 수업을 마치고 동대문에 가야 해서 각종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우스개 소리로 학과 동기가 "설마 부모님이 안 도와주시겠어 도와주실 거야"라고 했지만(내가 다니던 학과는 정말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시더라..) 나는 정말 내 돈으로 학비를 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돈을 벌어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고 좋았다.
그리고 대학원 수석 졸업을 하여 졸업생 대표로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생 대표가 됐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냉면 먹다가.. 전화받음)
그리고 나는 캐나다 대학교에 진학을 하게 된다.
대학원 전공은 광고브랜드 디자인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웹 쪽을 더 배워보고 싶었고 외국계 회사를 다니다 보니 아 몇 년쯤은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사람일은 한 치 앞을 볼 수 없듯 코로나라는 변수가 생겼고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게 된다.
캐나다 시간에 맞게 수업을 했기 때문에(한국으로는 새벽~아침시간) 오전에는 회사를 다닐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그래서 오전에는 단기 6개월 계약직으로 대성이라는 그래도 큰 회사에서 브랜드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급하게 만든 포트폴리오라 지금 보면 창피한 수준이지만 그래도 내가 나온 과가 광고브랜드디자인이다 보니 부족한 포트폴리오지만 뽑아주셨던 것 같다.
계약직으로 들어갔지만 처음 '디자인팀'이라는 팀 아래에서 다른 동료들과 일한다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말 전문적으로 패키지 디자인, 편집디자인, 사진 보정 등을 사수 디자이너 분에게 배웠는데 정말 좋은 분을 만나 꼼꼼하게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못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창피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열심히 해서 계약기간이 끝날 때쯤에는 직원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웹 쪽으로 진로를 정했기 때문에 감사하지만 거절했다.
위의 경험들을 통해 나는 웹, 패키지, 제품, 편집 디자인을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처음부터 하나의 포지션이 정해져 있는 회사에 들어갔다면, 학비를 벌기 위해 프리랜서, 쇼핑몰을 하지 않았더라면, 단기로라도 디자인 계약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얻을 수 없는 값진 기술들이었다.
이때 만나게 된 브랜드가 바로 밤켈이다.
밤켈은 아웃도어 브랜드로 국내에서 캠핑을 조금 한다 하는 분들은 모두 아는 브랜드일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 시작은 새로 나오는 제품의 택 작업이었다.
원하시는 스타일을 전달받고 시안을 만들어 전달드렸는데, 돌아온 피드백은 부정적이었다.
원하는 콘셉트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분명 이 콘셉트이라고 했는데 이게 아니라고? 내가 맞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안 하겠다. 다른 분 알아보셔라 라는 말을 할까 고민했다.
사실 Tag 디자인은 다른 디자인 작업에 비하면 작은 것이었고 하지 않으면 그만일 수도 있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작은 것이라도 최선을 다하자라는 마음이 있었다. 이렇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았다고 안 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시간을 들여 다시 콘셉트를 정해 작업하였고 이때부터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택 디자인으로 시작하여 그다음에는 패키지 디자인, 쇼룸 디자인, 콘텐츠 디자인, 상세페이지 디자인 등 밤켈 브랜드와 관련된 모든 브랜드 디자인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년부터 함께 슈펜, 파리바게뜨 콜라보를 지나 이번 대한항공 콜라보를 진행하게 됐다.
그리고 2023.08.31 대한항공과의 콜라보 제품이 오픈했다.
택 디자인에서 시작한 일이 대한항공 콜라보 제품 디자인까지 이어지다니,
나에겐 정말 뜻깊은 일이다.
2023.08.31일 오픈 박제
만약 내가 첫 회사에서 웹디자인 일만 했더라면,
대학원에 학비를 벌기 위해 쇼핑몰을 하지 않았더라면,
프리랜서로 외주를 받지 않았더라면,
대성에서 계약직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할 수 없었던 디자인들이다.
내 본업은 UX 디자이지만 밤켈에서는 그와는 완전 다른 브랜드 디자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한항공과의 콜라보는 겨울부터 시작하여 거의 6개월 넘게 진행되었다.
시안을 여러 개 만들어 거의 컨펌 직전까지 갔다가 어그러지는 일이 다수.
그래도 꾸준히 피드백을 반영하고 시안을 만들어 내면서 지금의 백팩과 드라이백이 나오게 되었다.
이번 일을 통해서 스스로 또 한 번 깨달은 것이 있다.
어떤 일이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건 내 몫이고,
어떤 경험이던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모든 일은 다 연결되어 있다고 했듯,
손흥민 선수가 인생에 후불은 없다고 했듯
내가 지금 맡은 일에 열심히 그리고 진심을 다해한다면 미래에 나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 순간 열심히였다면 진심이었다면
나 스스로 떳떳한 시간이니 되었다.
UX 디자이너지만 캠핑브랜드의 가방을 디자인했다.
비전공자였지만 지금은 디자이너로 일한다.
앞으로의 내가 또 어떤 사람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매 순간 열심을 다해 살았으면 좋겠다.
이상 콜라보 오픈으로 벅찬 디자이너의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