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의 정체성을 지킨 채 굳센 사람이 되기
붕대라는 단어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내 주위에 있는 수없이 많은 간호학 전공 친구들이었다. 나는 언제나 왜 '빠른 취업'을 희망하는 '여성'들은 간호학과를 선택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간호'라는 누군가를 돌보고, 가꾸는 일은 여전히 상당수 여성들의 책임으로 남아있는 걸까.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결한 일들이 있다. 간호사는 단순히 아픈 이들의 신체적 건강을 책임지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역할을 한다. 빠른 취업을 희망하던 여성들은, 자신들을 깎아내어 우리 사회를 돌보고, 누군가를 위해 붕대를 감고 있으나 그들에게는 마땅한 붕대가 돌아가지 않는 게 현실이다.
물론 책의 내용은 간호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지만 내가 가졌던 의문과 많은 지점에서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11명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펴낸다. 그리고 이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남성이 등장하지 않은 책임에도 어색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와닿는 이야기였다. 11명은 다르면서도 같은 고민들을 품고 산다. 페미니즘 운동을 하면서도 서로 지향하는 바가 다른 이들, 오랜 기간 친구로 지내왔으면서도 속으로는 서로의 행동을 피곤하게 여기는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딸의 성향을 지지하면서도 은연중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는 엄마가 있고, 선배를 존경한다 하면서도 가까이에서 본 모습이 환상을 깨지게 하여 상처 받는 이도 있다. 이들은 다 같은 여성이지만 다 같지 않다.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여성을 '신성한 엄마', 또는 '더러운 창녀'라는 두 가지 이미지로 굳혀왔다. 이분화된 상태에서 인식이 굳어지고 난 후에 깨부수기는 쉽지 않다. 윤이형 작가와 같은 이들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알아왔고, 봐왔던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한다.
특히 11명의 이야기 도중, 나를 그대로 그려낸 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내가 항상 마음 한구석에 담아두고 고민했던 것들, 마주할 때마다 껄끄러워 어쩔 줄 모르던 것들이 있었다. 누구나 이런 고민을 안고 산다는 사실에, 우리는 함께라는 기쁜 마음이 앞서다가도 다들 이렇다면 세상엔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슬픔이 뒤따라온다.
어른들은 어디서 울까. 어른이면 그래야 하는 건가. 저렇게 빈틈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아픈 티도 안 내야 하고, 고양이처럼 아무도 없는 데 가서 혼자 숨어 울어야 하는 건가. 나는 어른 돼도 그러기 싫은데.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투정 부리고 싶을 땐 투정도 부리고 싶은데. 쌤의 그 곧은 어깨를, 늘 곧던 어깨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던 힘을, 무게를, 채이는 자주 생각했다.
어른이 되기 싫다는 소리를 입버릇처럼 내뱉는다. 여전히 내 마음은 여려서 아프고, 시린 감정들을 혼자 견뎌낼 수 없다. 뚜껑을 열 때는 누군가의 손이 필요하고, 블라우스 지퍼를 올릴 때도 닿지 않는다며 등을 내밀어야 한다. 곧은 어깨를 가진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긴 하나, 남몰래 삼킬 눈물을 생각하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이만 어른이 되며 맞닿은 세상은 곧은 어깨가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걸 보여준다. 넋 나간 사람처럼 있지 말라는 말씀은 곧은 어깨를 갖지 못하면 이분화된 세계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기 쉽다는 지혜였다. 세상은 갈수록 내게 매사에 죽기 살기로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빈틈없는 여성이 되게 한다. 그 안에서 나는 여태 지녀왔던 '여성'으로의 정체성을 지킨 채로 굳센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여성인권에 관심이 많음에도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칭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숏컷을 해야 하고, 화장을 반대해야 하고, 바지만을 입어야 한다고 믿는 말들에 맞설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예쁜 게 좋고, 실력을 칭찬받는 것만큼 예쁘다고 칭찬받는 것 또한 좋아한다. 나의 SNS는 온갖 꽃과, 알록달록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의 내 자아를 사랑하기에 '강한 리더십', 즉 '남성적 리더십'을 갖춰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무섭기도 하다. 점점 여성성을 포기하는 여성들을 볼 때면 굳센 어깨가 다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다.
무료해서, 무언가 칭찬이 필요해서, 인생이 칡 덩어리를 억지로 씹는 것처럼 쓰고 건조해서, 가끔 사람에게는 단 것이 필요하듯이, 혹은 별다른 생각 없이, 필터를 씌운 자신의 얼굴을 찍어 올렸고 그런 습관이 있는 사람답게 그걸 올린 뒤에는 자신이 관심 종자라는 생각에 조금 창피해져서 내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모르겠다. 나는 내 여성성을 정말로 사랑해서 지키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료한 인생 속에서 이를 발판으로 무언가를 얻기 위해 꼭 쥐고 있는 것인지. 내 얼굴 사진을 수도 없이 많이 찍으면서도 누군가가 '너 외모에 자신감이 상당하는구나'라는 말을 들으면 어쩐지 하루 종일 민망해서 그 말을 계속 곱씹게 되기에, 나의 여성성은 진실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자연스러운 의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판단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그런 생각들을 다 떼어내고 순수하고 깨끗한 일상이라는 걸 살아가지 못하겠어. 왜냐면 그런 건 나에게 없으니까. 나는 그저 퍽퍽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됐고, 건강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 아름답거나 사람들을 꿈꾸게 하는 무언가를 만들기보다는 내가 쓰는 문장들이 어딘가에 조금이라도 실용적인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됐어.
끝없는 고민과 자아 검열 속에서 어떤 게 적정선이고 어떤 게 과한 것인지 길을 잃는다. 그래서 더 이런 생각들을 묻어둔다. 이제 우리 사회는 선을 넘은 이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기 때문이다. 선을 넘을 것 같으면 아예 시도도, 변화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대로 사회가 정체해버리고 마는 건 아닐까. 미니스커트를 입어야지만 여성인권 주창자이던 시절을 넘어,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 게 여성인권 주창자가 된 급변하는 물살 속에서 정확한 포지션을 정하지 못했다. 나는 어쩌면 계속해서 그 언저리만을 맴돌지도 모른다.
사람들과 같은 꿈을 꾸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영원히 마음속에서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한 채 무의미한 웃음만 내비칠 수도 있다. 존경하면서도 증오하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 붕대가 주어진다면, 난 세연이처럼 한 바퀴 더 감기보다는 한 바퀴 풀어내어, 여성성을 지니고 사회에서 무언가를 쟁취하고 있는 이들을 모두 감아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쓰고, 이렇게 사람들을 내다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