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썰물과 밀물 같은 지난 2년이었다. 2022년에는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손쓸 방도 없이 쓸려갔다. 갑작스러운 썰물에 내가 의도하지 않은 많은 이별을 겪으며 상실감 속에서 추스르듯 한 해를 마무리했다. 2023년은 많은 새로운 기회들이 삶에 밀려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기회들이 빠르게 파도치듯 연이어 몰려왔고, 그 위에서 파도를 타야만 했던 해였다. 1년 간 내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해 보니, 내가 원래 계획했던 일들보다 예기기 않게 생겨나는 기회들을 더 열심히 붙잡으면서 살아낸 것 같다.
연초부터 비건먼지에게 트리퍼가 협업 제안을 주었다. 내부적으로 논의했던 뉴스레터를 협업을 통해 시도해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원고료와 활동지원금으로 고정적인 수입이 생겨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감사한 기회를 주신 업계 선배님께 감사하다. 게다가 올 한 해 새로운 멤버들도 만났다. 아직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활발한 활동으로 큰 존재감을 뿜어내는 멤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이런 멤버들을 만날 수 있었던 인연이 감사하다.
연초에 새로 팟캐스트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마포 FM 프로그램 제안을 받았다. 비정기 편성 때 프로그램을 편성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홈레코딩보다 훨씬 좋은 컨디션으로, 주기적인 녹음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전에 일을 쉴 때도 잠깐 마포 FM 프로그램 수업을 들었을 정도로,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대부분 2주에 한번 꼬박꼬박 라디오 녹음을 했다. 아이템 발굴하고, 50분 함께 구성해서 떠들면서, 말하기가 그때그때 편차가 좀 나긴 해도 많이 늘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초에 ‘말하기’를 더 잘하고 싶다는 데 꽂혀 보이스/스피치 코칭도 받고, 영상 보며 연습도 꾸준히 했는데, 그 성과이자 연습의 연속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한 기회였다.
봄을 앞두고는 개인 칼럼 제안을 받았다. 3월에 여성동아에 비건 직장인 칼럼을 쓰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고 유료 지면에 내 글을 싣는 경험을 했다. 역시 나는 내 콘텐츠를 계속 만들어가고 싶구나, 하는 창작자의 정체성을 깨닫는 좋은 기회였다. 사실 1-3월에는 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다시 일하면서 저녁마다 소설 수업을 듣고 개인 영화제작을 준비했었다. 올해 계획은 ‘이야기를 만드는 한 해’였으니 시작이 좋았다. 동시에 창작의 어려움에도 부딪친 한 해였다. 예전에 써놓은 시나리오를 수정하며 완고를 했는데, 나 자신도 만족이 안 되고 피드백을 받을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따뜻해지는 봄에는 이직 제안을 받았다. 다시 돌아간 회사에서 과장 직급을 달고 일한 지 몇 달 째였다. 예전보다 업무강도도 약하고 처우도 많이 좋아졌었다. 경기가 나쁘고 광고 회사들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먹거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AE니까 인정받았다. 손에 익은 일을 다시 하고 또 잘하니까 자존감도 올라왔다. 직전에 잠깐 있던 회사에 있을 때와 다르게 PT 타율이 올랐고, 규모 있는 PT에 초청되어 준비하며 많이 배웠고, TVC 캠페인도 진행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내가 매일 8시간(출퇴근까지 하면 10시간 이상) 바쳐서 일하는 이 일이 결국은, 영양제나 안마 기계 같은 소비재를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게 만든다는 점이 내 열정을 식게 만들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넥스트 커리어로 콘텐츠 창작을 염두에 두고 있을 때, 콘텐츠 기획 일을 제안받았다. 마케터에서 콘텐츠 제작관리 업무로의 직무 이동이라 고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콘텐츠 기획과 창작을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직을 했다. 그렇게 널위한문화예술의 콘텐츠 PM이 되었다. 새로운 콘텐츠 문법을 배우고, 직접 기획하고 제작 관리를 하는 업무를 하며 재미를 느꼈고, 인풋이 많아지니까 일이 더 재미있어졌다. 업무를 하며 매번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는데, 제작 주기가 빠른 편이라서, 짧은 기간에 많은 이야기를 기획하고 세상에 내보일 수 있었다. 올해 목표가 ‘이야기를 만들자’였는데, 어쩌면 이직을 통해 그 부분을 채웠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든 기회라기보다 나에게 온 기회를 잡은 것이지만, 이 역시 언젠가의 내가 만들어낸 기회 아닐까? 시기적으로 적절한 때에 이 기회를 만나서 감사했다.
그리고 사무실도 가까운 데다가 재택근무가 자유로워 삶의 질도 많이 올라왔다. 아침 8시부터 나와서 서울을 가로질러 강남에 갔다가 일하고, 점심으로 가공식품이나 도시락 또는 불완전한 채식을 하고, 다시 집에 오면 저녁 8시가 되는 그런 삶을 살다가, 아침과 저녁이 있는 삶과 식사를 손수 해 먹을 수 있는 삶을 살게 되니까 너무 좋았다. 건강을 더 신경 쓸 수 있었고, 올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6-7키로 정도를 감량했다. 중간에 잠깐의 휴지기도 있었지만 대체로 꾸준히 운동도 갔다. 내년에는 더 열심히 운동해서, 더 강하고 마음에 드는 몸으로 살고 싶다.
게다가 이직을 기회로 하반기에는 여성영상인 커뮤니티 프프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전에도 계속 사이드로 유튜브 영상 제작과 영화작업을 해왔지만, 본업으로 영상 콘텐츠를 다루게 되니 프프프에 들어갈 명분이 생겼다. 비건 유튜버로 만난 양둥이하우스 하양언니 제안으로 미음 먹게 되었다. 올해 초부터 함께 떡국 먹고 전주국제영화제도 같이 다니며 양둥×먼지는 계속 친해져 왔고, 얼마 전에는 크리스마스 파티도 함께했다. 그리고 프프프에서 '포트폴리오 워크샵'을 열어달라는 제안을 받아 얼마 전에 <전직 마케터가 말하는 선택받는 포트폴리오> 강의안을 준비하고 포폴 리뷰까지 함께 했다.
그리고 올해 정말 중요했던 사건! 바로 비건먼지 다큐멘터리 제작 지원사업이 통과하는 일이 일어났다.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사업 수행을 시작하자, 하반기가 정말 바쁘게 흘러갔다. 회사 일 하는 시간 제외하고는 이 영화 작업이 삶의 1순위가 되었다. 치열하게 플롯을 짜고, 섭외와 사전인터뷰 준비, 사전인터뷰, 조사. 휴가를 내고 촬영을 가고, 주말에도 촬영준비와 촬영으로 보냈다. 틈틈이 사업변경서를 내고, 연말에는 포스트 작업과 회계마감을 하고, 또 보고서를 위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갔다. 이 회고를 쓰는 12월 31일 바로 전일에도 영화 내부 시사회가 있었다. 이 영화도 하나의 이야기라면 이야기니까, 올해 목표에 맞게 잘 만난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많은 시간을 냈어야 하는데, 기꺼이 함께 해준 팀원들에게 더욱 고맙다.
본업 외에 다양한 일 기회들도 있었다. 온라인 마케팅 컨설팅 요청을 받아 진행하는 김에, 이런 니즈가 있구나 깨닫고 컨설팅용 포폴도 정리해서 오픈해두기도 했다. 연말에는 마포FM에서 마포 북 페스타 마케팅으로도 함께 협업할 수 있게 되었다. 북 페스타 홍보라니 신이 나서 행사 개요 본 뒤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계속 떠올랐다. 퇴근하고 주에 한번 회의하고 저녁이나 주말마다 홍보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함께 하고 있다. 내년 2월에 여는 <마포 각양각책 북 페스타> 많이 즐겨주시면 좋겠다.
또 올 한 해 솔로로 지내면서 생긴 기회들도 많았다. 연애에 쓰던 시간이 비는 만큼 여러 행사와 모임에 더 갈 수 있었고,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과의 다양한 모습의 관계를 상상하며 만나볼 수 있었다. 오래간만에 낯선 이들과의 데이트, 술자리, 소개팅, 모두 내게 좋은 경험이자 새로운 세계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올해 초 글쓰기 수업을 다니면서, 이런 나의 경험들을 글로 많이 남겨놓았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재밌다. 데이트를 하러 갔다가, 다양한 도시 청년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내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물론 연애로 이어지거나 잘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채식을 이유로 갈등을 빚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자주 일어났고, 나를 가스라이팅 하는 사람부터 데이트보다 상담과 약물치료가 시급해 보여 걱정되는 사람들, 그리고 내 성격의 단점을 거울치료 시켜주는 사람도 만났다. 게다가 만났을 때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친구가 전에 만나던 사람이었던 해프닝도 있었다. 그 와중에 SNS에서 나를 온라인 스토킹 하려던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 ‘인셀남’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고, 잠시동안 내 셀피와 거주지가 알려진 모든 게시물을 내리고 계정을 비공개했어야 하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녹색당 글로벌 정당대회에 갔다가 알게 된 외국인 친구들과 녹색당 친구들과 함께 이태원 클럽도 가봤다. 그때 너무 재미있게 놀아서 클럽에 오랜만에 재미를 붙이고, 여름에 한 3주 정도는 기회만 되면 클럽에 가서 놀았다. 주위 솔로인 친구들과 함께 가서 술 마시고 춤추고 놀았다는데, 20대 초반처럼 짧은 치마에 진한 화장을 하지는 않고 치렁한 원피스에 맨 얼굴, 히피펌에 늘어지는 귀걸이를 하고 그야말로 히피처럼 하고 다녔다. 그래서 외국인이냐는 오해도 많이 들었는데 오히려 그 편이 더 편하고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술을 엄청 먹고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살면서 처음 일어난 일이었다. 정말 황당하기도 했고, 스스로 반성도 많이 했다. 이직을 앞둔 직전이었는데, 그때 새로운 핸드폰을 사고 이후에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레 클럽과 멀어졌다.
그 시기에 지금 만나고 있는 애인도 만났다. 회고모임과 비건먼지를 같이 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나게 되었고, 계속 만나고 있다. 술 마시고 놀다가 핸드폰까지 잃어버린 나를 위해 그만 놀러 다니고 안정적인 관계에 시간을 쏟는 건 어떻겠냐는 메시지로도 느껴졌는데, 그래서 큰 기대 없이 호기심을 품은 채 나갔다. 그런데 연애할 마음이 없던 시기임에도 계속해서 만날 만큼 재밌고 배울 점이 있었다. 첫날부터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차가 끊길 때까지 대화하고, 우리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나와 하고 싶은 게 많고, 내 옆에서 행복해한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나 역시 행복하고 재밌다. 비건 페미니스트인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가 안 가거나 궁금한 것은 솔직하게 물어보고 대화한다. 나 역시 불편한 지점은 숨기기보다 꺼내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뉴스를 자주 보는 사람인데, 나 역시 정보를 좀 더 다양하게 인풋 해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닮은 듯 너무 다른 그와의 여러 가지 대화가 글쓰기에도 좋은 인풋이자 자극이 되고 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내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생각이 난다. 그리고 내 생각을 대중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조금 더 다면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서, 보완되는 부분들도 있다. 어떤 의제를 가지고 열심히 떠들고 난 다음에 아 그래서 내가 이런 마음이었고,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구나 깨닫게 되는 부분들이 있다. 등 뒤를 봐주는 사이처럼, 비슷한 논리의 다른 결론을 가진 의제들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게 흥미롭다. 때로 서로 너무 다른 배경지식을 갖고 있어서 서로의 의견을 넘겨짚고 오해해서 그 오해를 푸느라 피로할 때도 있지만, 이를 또 대화로 잘 풀어내면서도 많이 생각하고 배우게 된다. 내 의견은 무슨 방향이었는지 언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내년에는 좀 더 나다운 글을 꾸준히 많이 쓰고 싶다. 오늘 글처럼 나를 더 드러내거나, 뉴스나 외부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보면서 나만의 시각으로 풀어내는 글을 많이 쓰고 싶다. 꾸준히 연재하다가 기회가 닿으면 매체에 기고도 하고 싶다. 유튜브를 계속 운영하니 다양한 협업 기회가 오고, 팟캐스트를 무작정 시작했는데 이를 모니터링하다가 보이스 코칭도 받고 라디오까지 가게 된 것처럼. 내년에도 더 많은 기회를 만나고 또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내가 꾸준하고 성실하게 하면, 잘하게 될 것이고, 잘하는 것은 누군가 알아봐 줄 것이다.
2024년 우선순위를 어제부터 세우고 있다. 액션아이템과 루틴, 필요한 페이지까지 세팅해두고 나서 1월 1일을 맞이할 생각이다. 2024년을 아우르는 핵심 키워드를 내일까지 뽑고, 또 2024년을 여는 글을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