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경인지, 방탄소년단을 알게 되기 전까지 힙합은 내게 생소하다 못해 진지하게 들어본 적도 없는 장르였다. 힙합 섞인 팝이 유행가처럼 번질 때, 어디서든 나오는 노래를 그냥 흘려 듣고 있었을 뿐, 실은 매우 싫어했다고 하는 쪽이 맞다. 그렇게 난리 법석이었던-심지어 아래 Agust D의 <The Last>에도 나오는- Mnet의 <쇼 미 더 머니>도 여태 한 번 본 적이 없다. 가사를 멜로디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유행하는 힙합곡이 쏟아내는 내용들이 그리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맥락도 없는 돈자랑이라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김수아·홍종윤 저 <지금 여기 힙합>을 보고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됐다.)
그랬던 내가 방탄소년단을 접하고, 그들이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방탄소년단의 초기 곡 중에는 '힙합성애자'라는 곡도 있을 정도로 그들은 나름대로 힙합에 진심이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 같다.- 힙합을 이해하기 위해 학제로는 '흑인학 Black Studies'으로 분류되는 책들을 찔끔씩이나마 읽고, 팝음악사와 힙합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으니 팬심은 위대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내 공부에 결정적으로 불을 붙였던 건 Agust D(BTS의 멤버 SUGA)의 첫 믹스테이프 Agust D에 실린 <The Last>라는 곡이었다. 가사를 조금 발췌해 보자면 이렇다.
"……가끔씩 나도 내가 무서워 자기 혐오와 다시 놀러 와 버린 우울증 덕분에 이미 민윤기는 죽었어 (내가 죽였어) 죽은 열정을 남과 비교하는 게 나의 일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
정신과를 처음 간 날 부모님이 올라와 같이 상담을 받았지 부모님 날 잘 몰라 나 자신도 날 잘 몰라 그렇다면 누가 알까 친구? 아님 너? 그 누구도 날 잘 몰라
의사 선생님이 내게 물었어 (─한 적 있냐고, 있냐고)
주저 없이 나는 말했어 그런 적 있다고
버릇처럼 하는 말 uh i don't give a shit i don't give a fuck 그딴 말들 전부다 uh 나약한 날 숨기려 하는 말 지우고픈 그때 그래 기억 조차 나지 않는 어느 공연하는 날 사람들이 무서워 화장실에 숨어 버린 나를 마주 하던 나
……(후략)……"
노래가 처음 풀렸을 때 모니터를 앞에 두고 수 시간을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우울증 환자였고 나도 사람들이 두려운 때가 있었으니까, 일종의 감정적 공명이 일어났다고 해야할까. 이렇게까지 자기 자신의 심리적 취약성에 대해 말하는 곡도 (아마 수행이 얕은 것이겠지만) 나는 처음 들어 보았다.
곡은 우울하지만은 않다.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Agust D는 자신의 이상과 현실이 어떻게 봉합되고 있는지를, 그래서 자신이 어떻게 '괜찮아지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제는 괜찮다고, 그렇게 힘들었지만 나아지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고 지금은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노라고. 악바리다운 근성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그것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강단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한계까지 치달았을 때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맞서는 방법도 있다고, 새로운 길을 본 것 같았다. 나보다 앞서 간 든든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길을 마주한 기분이라고 해야겠다.
누군가는 뒤에 나오는 'Seiko에서 Rolex, Ax에서 체조'라는 가사를, 시계 브랜드와 공연장 사이즈가 암시하는 물질적 성공을 두고 비웃기도 했지만, 사실 나도 힙합의 '플렉스flex'와는 이 노래를 차별화하는 의미에서 가사가 달랐으면 조금 더 좋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긴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정신적 문제들을 극복하려 노력하는 과정에 물질적 성공이 따라 온 것뿐이라고. 그걸 다수의 대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냥 물질적 가치를 지닌 이미지들로 표현한 것 뿐이라고. 그러니 맥락 없는 돈 자랑은 아니라고. 너무 나이브naive한가? 그래도 좋다. 나는 아직도 지치고 힘들 때 이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부르는 이의 고통과 극복을 느껴보려 노력한다. 그러면 나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The Last>를 계기로 나는 힙합이라는 장르로 분류되는 노래들을 좀 더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났던 게 Logic의 1-800-273-8255다. 워낙 유명한 노래니 알 사람은 알겠지만, 암호처럼 알쏭달쏭한 숫자는 미국의 자살 예방 센터 전화번호다. 그리고 노래 제목에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듯 Logic은 이 노래에서 자살 문제를 다루고 있다.
"I've been on the low I been taking my time I feel like I'm out of my mind It feel like my life ain't mine Who can relate?
I've been on the low I been taking my time I feel like I'm out of my mind It feel like my life ain't mine
I don't wanna be alive I don't wanna be alive I just wanna die today I just wanna die I don't wanna be alive I don't wanna be alive I just wanna die And let me tell you why
……(중략)……
Pain don't hurt the same, I know
The lane I travel feels alone
But I'm moving 'til my legs give out
And I see my tears melt in the snow
But I don't wanna cry
I don't wanna cry anymore
I wanna feel alive
I don't even wanna die anymore
Oh I don't wanna
I don't wanna
I don't even wanna die anymore"
Agust D의 노래가 스스로를 강하게 담금질한다면 Logic의 노래는 좀 더 따사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주제를 두고서 하는 표현의 차이일 거라고 생각한다. 노래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이의 독백으로 시작하지만,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노래하는 것으로 점차 마무리된다.
'고통이 같을 수 없음을 알지만Pain don't hurt the same, I know', '혼자 걷고 있는 이 길이 외로움을 알지만, 내 다리의 힘이 다할 때까지 움직일 것이며The lane I travel feels alone But I'm moving 'til my legs give out', '내 눈물이 눈 속에서 녹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울고 싶지 않다고, 더이상은 울고 싶지 않다고And I see my tears melt in the snow, But I don't wanna cry, I don't wanna cry anymore', '사실은 죽고 싶지 않다고I don't even wanna die anymore', 끝끝내 말한다. MTV 공연에서는 노래 막바지에 성적 지향, 피부색, 종교 등에 상관없이 평등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도 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주류 미디어가 다루기 좋아하지 않는 주제들, 정신 건강, 자살 등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자리를 주어서 고맙다고도 했다.
이렇게 말하는 Logic은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를 둔 (이 단어를 별로 사용하고 싶진 않지만) 혼혈아다. 다만 외모로만 보았을 때는 백인에 가까웠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백인 커뮤니티와 흑인 커뮤니티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했고, 어머니는 알코홀릭에다가, 수차례 Logic을 살해하려 들었다고 한다. Logic 자신도 때때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죽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사랑과 평화를 외치고 있다.
Agust D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Logic의 노래를 들으며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지금 힘들어도 자살만은 하지 말자고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겼던 것 같기도 하다. 아직 내가 모르는 어떤 삶의 아름다움이 존재할 것이라고, 위안받았던 것이다. Agust D의 노래가 이정표이자 등대가 되어주었다면 Logic의 노래는 내게 희망을 주었다.
괴롭기 그지 없는 삶의 무게를 알면서도 누군가를 향해 '그래도 죽지 말라'고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내야 했을까? 또 '사실은 나도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다고,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고' 대중 앞에 말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렇지만 이들이 용기를 내 준 덕분에 나 역시 어떤 고비를 넘겼고, 지금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끝이 없을 것만 어둠이 찾아온 날, 밝은 노래를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날, 이 두 노래를 아껴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