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 최유리
2021. 6. 3.
넌 내 옆에 있지도 않아. 그렇다고 떠나지도 않아. 진심을 가장하고 진심인 척하는 나쁜 사람일 뿐이야. 넌 네가 나쁜 줄 몰라. 내가 나쁜 줄 알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몰랐던 척. 네가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는 왜 생각을 안 해. 너는 네가 충만하다고 생각해. 나는 그런 너를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는 부족해. 하지만 넌 날 충만한 듯 대해.
매번 번뜩이는 감정을 빠르게 적는 동시에 연필 촉은 금방 무뎌져 간다. 대체로 우울한 감정이 휘몰아칠 때 글을 쓴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순간마다 느끼는 감정을 작은 메모장에 쏟아붓기를 반복한다. 이 때문일까, 연신 메모장을 뒤적거려도 태반의 글은 어둡고 우울한 느낌으로 물씬거린다. 감정에 치우쳐 두서없이 나열된 문장들이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지금껏 기록과 가장 유사한 행위를 한 것이라면 이뿐이다.
기록.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것. 사람들은 왜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글의 형태로 그 순간을 남기려고 할까. 문득,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록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오늘 어떤 종류의 밥을 먹었는지, 어떤 곳을 갔는지, 이런 가벼운 내용을 써 내려 가는 게 기록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아마 그들에게 기록이란 두고두고 어떤 찰나를 기억하기 위한, 또는 다 지나간 일들을 온전히 추억하기 위한 도움닫기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덜컥 2018년의 나는 어땠는지를 물었다.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쳐서가 아니라 떠오르는 내가 없어서. 내겐 그 시절을 묘사할 만한 기록다운 기록 하나 없고 시간은 이미 흐를 대로 흘러 기억은 희미해져 있었다. 그나마 있던 적은 양의 기록들을 들춰 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과거를 추억하기에는 한없이 빈약한 일기장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과거의 보통 날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기에 기록하는 것일까. 그 어떤 청춘도 선명히 떠올리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순간 멍해졌다.
왜 여태껏 기록을 자주 하지 않았을까. 아마 나는 글이 습관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매일같이 이토록 섬세한 감정을 느낄 수도 없을뿐더러 내게 기록은 강렬하고 일시적인 찰나를 적는 행위이다. 그 찰나는 두 번 다시 없을 누군가의 죽음 이기도 행복해서 눈물이 나는 기이한 광경이기도 했다. 일상에서 마주할 일이 거의 없는 그런 일들. 그 순간에 머릿속에 스치는 오만 가지 생각을 어떤 회로 과정도 거치지 않고 거침없이 적는다. 머리말도 마무리도 없는 혼돈의 글은 특별한 날에 가끔, 아주 가끔 기록의 형태로 남는다.
드문드문 적힌 글을 보고 있자니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경이로울 지경이다. 별다른 날도 아닌데 매 순간을 곱씹으며 글로 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며칠만 그들의 일상을 나의 일상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사흘 동안 매일 밤 일기를 썼다. 어떤 날은 친구와 산책을 하다 집에 들어왔다. 한 달에 몇 번은 있는 아주 흔한 날이다. 아무 생각 없이 펜을 잡았다. 뒤이어 무심코 지나쳐 왔던 것들이 펼쳐진다. 거리에서 마주친 길고양이, 노오란 꽃, 그리고 녹음이 우거진 푸른 여름은 모두 묵묵히 지나갔지만,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순간은 아니다. 나의 24살 초여름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어쩌면 다시는 경험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산책이 언제 또다시 오늘과 같을 수 있을까.
오늘은 자극적이지 않았고 특별히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면 잊고 살았을 찰나의 연속이었다. 헌데 막상 기억하고 싶을 때 떠오르지 않을 것들이라 생각하니 어딘가 공허해지고 서운했다. 추억은 곱씹지 않으면 그 가치를 금방 잃고 만다. 그날의 날씨는 물론, 그날 내가 들렀던 장소, 그리고 그날의 마음마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다. 방치된 추억 중에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록은 보통의 어느 날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한다. 결국 또 다른 시간인 여운을 내게 선물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유달리 기록하기 좋은 날은 없다. 평범했던 날마저 기록을 통해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날이 되고, 각별히 잊고 싶지 않은 날이 되기도 했다. 계속해서 기억하고자 혹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고픈 예전의 나날들을 다시금 펼쳐보면 이내 새로운 감정이 타오른다. 남은 청춘도 여한 없이 남기고 싶다. 다시 돌아갈 수 없어 애틋한 날도 특별하게, 평범했던 날도 특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