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는 방법 1
마흔,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13년 차 사회복지사로, 슈퍼바이저로, 두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으로서
무한 반복되는 생활이 버겁다고 느껴진 것도 신기하게 마흔을 몇 개월 앞둔 즈음이었다.
일은 여전히 좋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지금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나를 덮쳤다.
말로 할 수 없는 답답함, 그리고 나의 한계가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사는 것에 지쳤던 것 같다. 에너지가 바닥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사건이 지나갔고 그 일로 내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여름 내내 고민하다 9월 추석이 지나고 나는 퇴사를 통보했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세 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 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오마에겐이치, ’ 프레지던트‘, 2005년 1월 11일>
우연히 인터넷에서 다시 보게 된 문장에서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이 매직아이처럼 크게 보였고
‘나이 마흔이 되면 다른 공간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을 보이는 실체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9년 가을의 일이다.
끝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끝을 잘 마무리 짓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나에게 5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가을에 퇴사를 통보했지만 7년이라는 지난 시간을 무 자르듯 끊을 수 없었다.
말이 좋아 제주도지 내 뜻대로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많은 산들이 있었다.
직장에서는 갑자기 다 내려놓고 제주도에 간다니 휴직하는 건 어떠냐고 했다.
복지관의 어르신들은 시댁과의 갈등, 남편과의 사이를 걱정했다.
중간관리자로서 직장에 피해를 주기 싫은 마음이 분명 있었지만 한두 달 쉰다고 달라질 거 같지 않았다.
'곧 마흔인데 13년의 커리어를 포기해 버리면 다시 일할 수 있을까?'
'다시 이만큼의 돈을 벌 수 있을까?'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게 되면 어쩌지?'
사실 이때의 급여는 여태까지 내가 받는 연봉 중 가장 많은 금액이었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거 다 내려놓아야 되는데 그래도 진짜 가고 싶은 거야??'
묻고 또 물었는데도 내 안의 답은 "YES"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서프라이즈 한 결정을 했었는지 스스로도 신기한 일이다.
감사하게도 적지 않은 시간 덕분에 살 집을 구했고 남편과 시부모님 같이 가야 할 아이들도 설득시켰다.
연세와 생활비를 마련하였고 필요 없는 물건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함께한 사람들과 감사한 마음을 나누고 작별인사를 했다. 참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2021년 2월 25일, 마침내 바라던 제주살이가 시작되었다.
가위가 없어 갓 배달온 꿔바로우를 통째로 들고 뜯어먹으면서.. (우리가 이사 간 날 배달을 시작한 중국집이라니 잊을 수 없다)
공간을 바꾸는 일은 때때로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아주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제주.로 공간을 바꾼 후 내 삶은 상당히 바뀌었다. 삶의 속도는 조금 느려졌고 자연이 주는 무한 에너지에 매일 감동했다. 하루 24시간을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살 수 있고 공간 구석구석을 나 스스로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물건이 많지 않은 터라 각자의 위치를 정해주었다.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흐트러졌던 물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리 집 제1원칙은 ’ 제자리에‘ 였다. 물건을 사용하고 제자리에 놓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니 예전처럼 ‘양말이 없다’, ‘연필이 없다.’ 엄마를 찾는 일이 거의 없고 스스로 하는 일이 늘어났다. 공간이 바뀌니 아이들도 유능해졌다. ^^
내가 제주집에서 자유로움을 느낀 이유는 제주라는 지역적 특수성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공간에 대한 ‘주체성’이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능력이 ‘자유’를 선물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떠나고 싶어 하지만 그 공간이 주체성을 발휘할 수 없는 공간이라면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과 똑같이 답답해질 것이고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불행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결국 공간의 좋고 나쁨은 나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좋은 공간에 살아보는 것은 다이어트와 같아서 좋은 상태를 한 번 경험해 본 사람은 아주 작은 노력이라도 좋아지는 쪽으로 기울이게 됩니다. 언젠가는 이전의 어수선한 상태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속도 또한 서서히 느려질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시도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정리해 드립니다, 이지영>
내가 사는 공간은 결국 나의 다른 모습이다. 제주집은 내가 무능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다. 청소와 정리정돈은 재능이 아니라 생활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하게 해 주었다. 불필요한 것들을 제하고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로 채워가게 해 주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조금 더 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누군가 삶이 복잡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꼬인 실타래를 풀기 힘들다 느껴진다면 과감하게 공간을 바꿔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처럼 꼭 공간이동을 하라는 건 아니다. 화려하고 멋진 공간이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공간(물건)을 정해보기를 권한다. 온전히 공간을 컨트롤하는 자유함을 느껴보시길 바란다. 공간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가끔 가슴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제주의 하늘과 제주의 바다 제주의 소리를 소환한다. 무언가를 채우는 것보다 비우면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이제 제주살이는 추억 속에 있지만 나는 여전히 자유를 갈망하며 <나를 돌보는 딴짓프로젝트>를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