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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 윤 Aug 29. 2022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꿈 없는 자의 꿈


 어느 날 낮이었다. 입에 단내가 날 만큼 뛰어논 하루였다. 엄마들의 부르는 소리에 친구들은 하나 둘 집으로 갔다. 나는 혼자 백사장에 앉아 있었다. 갑자기 세상으로부터 홀로 나앉은 느낌이었다. 파도에 밀려온 검불이나 해초 무더기를 바라보다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이 점쳐지는 순간이었다.      


 중학교 국어 시간이었다. 수업 시간에 ‘나의 꿈’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수업 후 선생님이 부르셨다. 공부도 좀 하는 편인데 꿈을 크게 가지라고 하셨다. 꿈이 삶을 이끈다고, 여자도 얼마든지 교수가 되고 판검사가 되고 작가도 유명인도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어쩌랴. 선생님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나는 딱히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 당시 나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의 열성 팬이라서 최동원, 김용희, 김용철 이런 선수들을 추앙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프로야구 선수라고 말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자였고, 무엇보다 운동신경이 젬병이었다. 공이 날아오면 언제나 눈을 감았다. 요즘 내게 꿈을 물어보면 래퍼나 개그우먼이라고 말한다. 나영석 피디가 만든 예능프로그램 지락실을 보고 있으면 은지나 영지, 유진, 미미의 활약이 눈부시다. 이 지구가 커다란 오락실이고 우리는 눈 맑은 광인이 되어 지금 여기의 지락실을 맘껏 즐기고 간다면 얼마나 좋은가.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청소년 시절 특별한 꿈이 없었던 건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음악, 미술, 운동에 소질이 없었다. 외모가 뛰어나서 탤런트나 영화배우를 꿈꿀 상황도 아니었다. 한 살 터울인 오빠가 공부를 아주 잘해서 이목이 쏠렸기에 내가 공부로 무언가 되어야겠다는 기대도 없었다. 서운할 일은 아니었다. 작가를 잠시 꿈꾸기도 했으나 학교에 가면 지난밤 드라마 이야기를 실제보다 더 맛깔스럽게 재현해서 아이들의 숨을 꼴깍 넘어가게 했던 친구의 기에 밀렸다. MMORPG 게임에 빠졌을 때는 평생 게임만 하며 살아도 좋겠다 했는데 공성전이 열리는 날 어그로나 끌기 일쑤였고 현질로 게임력을 이어가는 나로서는 영혼을 갈아 넣으며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젊은 사람들을 따라붙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진학하고 직장을 다니고 지금처럼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주변의 기대 때문이다.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한다. 복 받으실 거예요. 그리고 성실함. 신은 특출한 재능을 주시지는 않았으나 체력과 성실함은 주셨다.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바로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대답이 자주 돌아온다. 바빠서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말도 한다. 고등학교도 진학하기 전에 수능 범위를 돌아야 한다는 공포를 버무린 눈먼 학습 목표가 그들을 보챈다. 때로는 자신의 꿈보다는 부모님들의 꿈이 앞에 놓이기도 한다. 입시 원서를   비로소 구체적인 고민을 시작하는  같다. 그때도 하고 싶은 일보다는   있는 대학이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취업과 받을  있는 연봉, 오를  있는 직급, 이직 가능성( 이런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하다니), 사라질  있는 직업  현실적인 고려도 많이 한다. 그런 가운데 어린 시절부터 향기에 관심이 많아 조향사가 되고 싶어 화학공학과에 진학한 제자가 좋아 보였다. 청소년기에 심리상담을 받고 심리상담가가 되어 부유하는 청소년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심리학과에 진학한 제자도 부러웠다. 자기는 평범한 대학에 가서 작은 회사의 직장인으로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제자도 멋지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유동성의 시대라지만 무언가 인생의  그림 하나 가지고 가는 것도 나쁠  없어 보인다. 아무렴 어떠랴. 어떤 인생의 그림을 그리든 그리지 않든 응원과 갈채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 나는 이제 확실한 꿈이 생겼나. 여전히 내 꿈은 좋은 사람이다. 좋다는 기준이 무엇이냐,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냐 열린 명제이니 얼마든지 함의를 확장할 수 있다. 일생의 목표로 삼아도 될 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정 아니다 싶으면 저한테 좋은 인생이면 된 거죠 하고 적당히 뭉갤 수도 있다. 그래도 한 가지 유념하는 건 있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줄 수 있을까. 가능성을 남겨두고 바빠서, 힘들어서, 이것 먼저 끝내야 해서 등등 온갖 핑계를 대며 유보하는 삶을 살지는 않을 생각이다. 좌절은 좌절대로 세게 하고, 미련 없이 도전할 것은 도전하며.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기대가 아니라 나 자신의 기대로 인생을 살리라.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여기를 사는 나 자신이어야 하니까.   

   

아 그래도 이 이야기는 해야겠다. 나는 지금도 행복하다. 이무렵의 창의문 고개를 지나다 보면 사는 일이 그 자체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어른대는 밤 숲의 그림자. 차창으로 넌출대며 밀려오는 바람.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았다는 안도감. 저 아래 마을에 반짝이는 불빛도 정답고. 퇴근길에 팩 소주를 하나 사들고 버스를 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숲의 터널을 통과하며 밤의 비의가 드러나는 순간 팩소주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쪼옥 들이키리라. (버스 내에서는 취식이 불가능하다고 기사님이 내리라고 하시겠지...) 아무튼 나의 여행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광막한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Nazim Hikmet)     

에르바르트 뭉크,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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