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가족의 형태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변해왔다. 프랑스 통계청(INSEE)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 가구의 37%가 1인 가구로 나타났을 만큼, 이제는 혼자 생활하는 것이 가장 흔한 가족의 형태가 되어버렸다. (물론 한국도 2023년 같은 기준으로 1인가구 비율이 35.5%라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살더라도 결혼 대신 동거(PACS)를 선택하는 커플들이 전체의 절반이 넘고, 10명 중 6명 이상의 아이는 혼외출산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제는 가족 형태에 대한 정의도 조심하는 추세이다. 개인적인 부분이라 상대방의 가족 구성을 물어보는 일도 없지만, 가끔 학부모 회의나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 '정상'이나 '일반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에 대해 불편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한 번은 '평범한 가정'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대화 분위기가 급속도로 식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의 시선으로는 다양한 구성이 곧 평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가족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건 그 자체로 일반적인 형태라고 정의하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졌던 가족의 형태가 이미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느낀다. 남녀가 결혼한 가정,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관계는 이미 소수가 되어 버렸다. 동성 커플의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아이에게 보호자 역할을 하는 성인이 둘 뿐인 경우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새엄마나 새아빠가 있는 경우에는 부모가 셋(엄마, 아빠, 새엄마/새아빠)이고, 형제의 부모가 다르다면 넷, 더 복잡하면 그 이상이 되기도 한다. 싱글 맘(대디), 재혼가정, 그리고 고작해야 입양 가정을 특별하게 바라보는 시선과는 사뭇 다른 형태의 관계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는 파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매일 오후 아이들 하교시간에 맞춰서 학교 앞에 모인 보호자 중에 부모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다. 물론 조부모나 삼촌/이모 같은 친척들이나, 우리에게도 익숙한 방과 후 선생님, 베이비시터도 있지만, 부모의 친구, 앞 집 사는 이웃, 그리고 가끔은 아이 친구의 부모가 함께 데려 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학교에 등록된 사람만 아이를 인계받을 수 있지만, 아이와의 관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주말에는 재혼 가정에서 지내는 아이를 만나러 오는 친아빠, 새로 생긴 형제자매, 가끔은 그들의 조부모까지 함께 모여 식사를 하기도 한다. 공원 벤치에는 유모차를 밀고 나온 젊은 아빠와,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고, 한쪽 그늘에서는 두 엄마가 함께 아이를 돌보기도 한다.
개인의 필요와 선택,
그리고 연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가족
프랑스 사회학자들은 이러한 변화를 가족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가족의 기준이 제도와 혈연 같은 전통적인 틀에서 벗어나, 각자가 선택하고 유지하려는 관계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가족은 더 이상 끊어낼 수 없는 절대적이거나 강제적인 운명이 아니라, 개인의 필요와 선택, 구체적인 생활 방식과 일상의 경험, 그리고 서로를 향한 연대가 만들어내는 결과로 이해된다.
가족의 민주화라는 개념은 곧 가족의 구조가 위계적인 모습에서 관계의 균형과 상호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모델이 사회적 표준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동거, 재혼 가정, 동성 부부, 한부모 가정, 조부모와 손주로 이루어진 가정 등 다양한 형태가 동일한 무게로 인정받고 있다. 더 이상 특정한 모델이 정상으로 규범화되지 않고, 각자가 선택하고 꾸려가는 생활방식 자체가 하나의 가족 형태로 존중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가족 구성원의 수나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가족의 민주화는 곧 관계의 민주화이기도 하다. 선택과 경험, 그리고 상호적인 책임감이 새로운 가족의 핵심 요소가 되면서, 인간관계의 다양한 가능성이 제도와 관습의 경계를 넘어 가족까지 확장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우리도 가끔 대안가족이나 유사가족의 개념으로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대해 문을 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통계로 드러나기 훨씬 전이었던 1975년에 유사가족이 갖는 의미에 집중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혈연적 관계도, 어떠한 제도적 권리나 책임도 없는 관계에서 가족의 의미를 찾고, 또 서로에게 삶의 이유가 되어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품의 중심에는 소년 모모와 노년의 여성 마담 로자가 있다. 그들은 프랑스 사회에서 소외된 이민자, 빈민, 매춘부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빈민 마을에 살고 있다. 마담 로자는 매춘부의 아이들을 맡아 돌봐주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는 상황의 부모는 아이를 로자가 사는 아파트에 맡기기도 했다. 그녀에게 맡겨진 아이들 중 하나가 모모였다.
처음, 이 둘의 관계는 명확했다. 로자는 보호자였고, 모모는 보호받는 아이였다. 하지만 로자의 몸과 마음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둘의 관계도 변화하게 된다. 그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조차 버거워하게 되고, 기억이 흐릿해지고, 때때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하는 혼란을 겪게 되면서 어린 모모에게 의지하게 된다. 모모는 그녀를 위해 약을 챙기고, 불안을 달래주고,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보호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모모에게도 로자는 단순히 먹을 것을 주고, 옷을 갈아입혀주는 보호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모모는 로자를 통해 어른의 세계를 이해했고,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워갔다.
로자는 옆에서 자신을 돌보는 모모에게 무한의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이 작은 존재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했다. 모모는 더 이상 단순히 그녀에게 맡겨진 한 아이가 아니었고, 마지막까지 삶을 붙잡을 수 있게 해주는 이유가 되었다.
이 둘 곁에는 언제나 몇몇 사람들이 함께했다. 이들 역시 혈연이나 어떠한 제도적 장치로 연결된 관계는 아니었지만,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그들 옆에서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하밀과 룰루 아저씨이다. 하밀은 알제리 출신의 노인으로 모모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이야기를 하면서 조용히 모모의 곁을 지키는 존재였다. 모모에게 하밀은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또 다른 어른의 역할을 했다. 특히 "사람은 존엄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는 그의 말은 모모가 로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룰루 아저씨는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는 특별히 성공하거나 안정된 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병세가 악화된 로자를 위해 약을 구해다 주거나, 모모가 홀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해결해 준 것도 그였다. 쓰러질 것 같을 때,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어른으로 모모의 옆을 지켜주었다.
이제 프랑스는 가족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부모와 아이, 어쩌면 엄마와 아이와의 관계도 새롭게 정의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모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 되고 있고, 최근에는 애착이란 감정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애착(L'Attachement)』이라는 깔끔한 제목의 영화는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는 50대 여성 산드라의 일상을 중심으로 한다. 그녀는 페미니즘 서점을 운영하면서 만족스러운 싱글 라이프를 살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알렉스와 그의 임신한 아내 세실이 출산을 위해 병원으로 급하게 가게 되면서 그들의 6살 아들 엘리엇을 잠시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와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도, 그렇다고 아이를 낳지도 않겠다는 선택을 했고, 그녀의 선택에 따라서 생활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엘리엇을 돌봐주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비극이 벌어지고 만다. 세실이 딸 루실을 출산 중 사망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럽게 혼자가 된 알렉스, 그리고 엄마를 잃은 엘리엇, 이 모든 비극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딸 루실을 보면서 산드라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녀가 알렉스의 가족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는, 혼자 아이를 돌보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빈자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밤새 루실을 돌보느라 녹초가 되었을 때나, 루실을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할 때, 그리고 일 때문에 엘리엇의 하교를 챙길 수 없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언제나 산드라였다.
그렇게 산드라의 이름이 엘리엇의 학교, 아동 인수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병원 비상 연락망에도 그녀의 연락처가 추가되고, 엘리엇이 우울할 때면 그녀의 문을 두드리고, 학교에서 그린 가족 그림에 그녀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부르는 호칭은 여전히 이웃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위치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열쇠를 한 벌 더 만들었다.
아이와 어른, 보호자와 피보호자, 이 둘 관계에서 혈연과 제도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게 될까? 모모와 마담 로사, 그리고 산드라와 엘리엇은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대답을 보여준다. 법적 권리도, 제도적 의무도 없는 관계 속에서 남는 것은 서로를 향한 의지와 신뢰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연대가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보다 불안정하다고 단정 짓지 않았으면 한다. 실제로 삶의 한가운데에서 가족보다 더 단단한 힘을 발휘하는 건 지금 옆에 있는 그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모모에게 로자는 살아 있는 유일한 어른이었고, 엘리엇이 느끼는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앞집 사는 산드라였다.
혼자 사는 것이 대세가 되고, 가족 이외의 관계에서 가족의 기능을 대체하게 되는 변화를 전통적 가족 형태의 붕괴라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서로에게 의지할 대상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의 최우선이 가족이 아닌 유일한 사회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된다.
※ 이미지:
- 그래픽 노블, 《la vie devant soi (자기 앞의 삶)》 표지- 『L'Attachement』 영화 포스터, 20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