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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근 Oct 21. 2023

새벽 대리기사들 괴롭히는 화장실, 추위, 비바람

대리기사 같은 이동노동자들에게 쉼터가 절실한 이유

이 포스팅은 오마이뉴스에서 21년 3월 23일에 기사화되었습니다(TOP배치). 

매거진 정리 작업을 위해 추가하였습니다.  



자정이 지나면, 45인승 대리운전 셔틀버스(합류차)가 부산 최대 번화가 서면의 한 백화점 옆 사거리에 멈춘다. 센터로 불리며 모든 대리운전 셔틀버스의 종점이자 환승지가 되고 있는 곳으로 보통 이삼십 분의 시차를 두고 한 대씩 또는 여러 대씩 셔틀버스가 들어온다. 정차한 셔틀버스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온 대리기사들은 번화가 여기저기로 흩어져 들어간다. 근거리 배차 시스템이라 콜 손님과 가까이 있어야 콜을 받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피크시간이 지나 콜을 받으려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2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기약이 없지만, 마땅한 대기 장소는 없다. 드물게 앉을 자리가 있는 건물 로비나 버스 정류장 벤치는 벌써 다른 기사들이 차지했거나 노숙자들이 누워있기 일쑤다. 만약 대리기사들이 앉을 자리를 그냥 지나쳐 간다면 콜 발생지와 떨어져 있어 콜 받기가 어려운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 


▲  가게 앞에 자리가 있지만 이용하지 않는 대리기사들

가게 앞에 의자가 놓여있는 경우도 있지만, 편하게 이용하는 대리기사들은 거의 없다. 점주들 역시 어려운 시국에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둔 자리를 대리기사들이 차지하고 있다면 흔쾌히 이해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대리기사들은 길거리 한구석에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일에 익숙하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기다릴 때도 있기 때문에 다리가 아프면 불편하게 기대 서 있거나, 불 꺼진 가게 앞에 쪼그려 앉곤 한다.  


만 원짜리 콜을 탄 경우, 수수료와 각종 경비를 제하면 5000~6000원 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실 대기시간마다 커피를 사서 편의점에 앉아 있기는 부담스럽다. 또, 점원이 지키고 있는 편의점은 오래 앉아 있을 만큼 마음 편한 쉼터가 돼 주지도 못한다.


봄, 가을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환절기와 겨울에는 감기와 추위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몇 해 전인가? 부산도 영하 20도 추위가 찾아온 적이 있었죠. 물론 새벽 되면 겨울엔 맨날 춥지만. 안 벌어 가면 집에 폰이고 전기고 죄다 끊기던 때라 길거리에서 죽어라 기다리는데, 새벽이라 콜은 없고 얼음덩이라도 이마에 대 놓은 것 같은 바람 때문에 머릿속까지 시린데, 나중에는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판단도 안 돼요, 정신이 멍하기만 하고. 어디피해 있을 데도 없고, 그러는 동안 전봇대처럼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버린 거지 ...."


부산·경남에서 10년 가까이 대리운전을 했다는 40대 후반 대리기사가 떠올린 기억이다.


장시간 근로하는데 추위, 비바람 피할 장소 없어


▲  두꺼운 옷 속에 몸을 파묻고 손님 끊긴 가게 옆에서 콜을 기다리는 대리기사들

이주노동자가 곧 이동노동자인 줄 아는 사람이 많을 만큼 아직도 이동노동자는 많은 이들에게 생소한 개념이다. 대리운전 기사처럼 이동하며 일하는 시간이 많은 노동자들을 이동노동자라 칭하는데, 배송과 배달직, 학습지교사, 보험·카드·정수기 등의 방문·영업직을 두루 포함한다. 최근에는 필수노동자로까지 분류되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의 근로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대표적인 이동노동자인 대리기사의 경우를 다시 한 번 보자.


지하철역 셔터가 내려가면 그들이 맘 편히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은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가게가 손님이 아닌데 들어가 화장실을 이용하기는 어렵고,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숍도 대부분 상품을 구매한 고객만 영수증 하단 비밀번호를 통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게 해 놓아서 대리기사들은 화장실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름에는 열대야에 시달린다. 걷기도 힘든데 대리기사들은 밤새 걷고 뛰기를 반복해야한다. 하지만 더위를 피해 휴식을 취할 곳은 마땅찮아서 숨이 턱턱 막히는 거리에서 그저 견디고 있을 수밖에 없다.


비가 오는 날도 곤욕을 치르기는 마찬가지다. 옷도 신발도 흠뻑 젖어가며 일을 하는데 정작 들이치는 비를 피하거나 대기하는 동안이라도 옷을 짜서 말릴 장소는 없다. 필수노동자라는 지칭이 무색해지는 현실이다.


대리기사만 20만인데, 이동노동자 쉼터는 전국에 20여 곳


이러한 이동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건립된 곳이 바로 '이동노동자 쉼터'다. 2014년 서울시장과 이동노동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필요성이 제기돼 만들어지기 시작한 이동노동자 쉼터는 그 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현재 서울 4곳(서초, 북창, 합정, 강동구), 경기도 5곳(광주, 수원, 하남, 성남, 시흥), 부산, 광주(광역시), 전남 여수, 전북 익산, 경남 창원, 제주까지 총 15곳이 운영 중이며, 서울 서대문구, 경기도 광명, 부천, 포천, 대구, 울산, 경남 김해 등지에서 개소를 준비 중이거나 건립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노동자 쉼터에는 어떤 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될까. 선진지를 벤치마킹한 뒤 만들어진 부산 이동노동자지원센터 '도담도담'의 경우, 평일(월~금) 오후 2시에서 익일 오전 6시까지 운영되는데, 카페처럼 꾸며져 있고, 커피를 마시며 휴대폰 충전도 하고, 안마기로 피로도 풀 수 있다. 홀 휴게실과 강의실, 상담실 그리고 여성전용휴게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의실과 상담실에서는 건강·법률·노무 등 이동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상담 프로그램과 음악 힐링·스트레스 해소 등의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각종 특강이 진행된다. 그 외에도 PC사용이 가능하며, 희망도서신청, 비오는 날 양심우산 대여 같은 부가적인 서비스 등이 진행됐다.


부산 이동노동자지원센터는 2019년 10월 개소 후 두어 달 만에 일평균 50명, 일일 최대 74명까지 이용하는, 부산 이동노동자를 대표하는 시설로 자리 잡았다. 코로나로 휴관과 개관을 반복하는 등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2021년 상반기에 누적 이용자 수가 1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주이용 층인 대리기사들, 특히 센터에서 만난 실제 이용자들의 반응은 환영일색이다. 코로나 이전, 이용자가 몰리는 새벽 시간대에는 의자가 부족할 정도였으니 필수시설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9년 10월 대구지역에서 발표된 '대리운전 노동자 실태조사'에서도 응답자 전원이 쉼터가 만들어지면 이용하고 싶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리기사는 물론 배송·배달, 방문·영업직을 두루 포함하는 이동노동자 직군에게 휴식과 도약의 공간이 되어주기에는 이동노동자 쉼터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동노동자 중 대리기사만 20만 명을 헤아리는데 이동노동자 쉼터는 건립을 추진 중인 곳까지 합쳐봐야 20여 곳이다. 법의 사각지대에 있어 정확한 규모 파악이 불가능하고, 기준에 따라 추정치도 달라지지만, 대리운전·택배·배달·학습지·보험·카드·정수기 관련 이동노동자에 모든 방문·영업직을 다 포함하면 전체 이동노동자 수는 백만을 훌쩍 넘어 수백만에도 이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쉼터 확대해 열악한 근로환경 개선해야... 과로사 예방도 필요


지난 2월 25일, 부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대리운전 노동조합은 대리기사들을 위한 대책들은 발표되지만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는 변화는 거의 없다면서 대리기사들은 여전히 "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하는 유령"이라는 격한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대리운전 보험료 중복납입의 부담을 덜어줄 보험단일화 시행이 목전에 다가왔지만, 실효성 있게 정착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대표적인 직종 중 하나인 대리운전이 산업화 된 지 20년도 넘었지만, 관련법은 여전히 표류중이다. 전격적으로 법제화되어 대리기사를 포함한 이동노동자들의 여러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쉼터를 대폭 확대하고, 쉼터를 통한 근로환경 개선이라도 속히 꾀해야 하는 이유다.


▲  지난 여름 코로나가 다소 잠잠해지자 쉼터에서 이동노동자 건강검진이 재개됐다 / 출처 : 부산 이동노동자지원센터 "도담도담" 홍보 블로그


대리기사, 택배 등 이동노동자들 중 상당수는 혹한, 혹서나 과로로부터 몸을 돌볼 여유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쫓기듯 일하다보면 기저질환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지는 않았는지 살필 여유가 사실상 없게 되는 것이다.

건강보험조차 가입 안 돼 있는 대리기사가 전체의 13.5퍼센트나 된다는 조사결과도 있었던 만큼, 대리기사 등의 이동노동자들이 다른 직군보다 건강검진을 더 잘 받을 확률은 낮아 보인다.

평균 연령 50대 초중반. 직업선택의 폭이 더 제한되는 60대 이상도 비교적 진입장벽이 낮은 대리운전으로 꾸준히 들어올 가능성이 높은 만큼 대리기사 등의 이동노동자는 그 어느 직종보다 꼼꼼한 건강검진이 필요하다. 이미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택배노동자의 과로사가 그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택배노동자의 경우,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제보로 알려지지만, 대리기사들의 경우는 대부분 사무실 출근 없이 홀로 일하기 때문에 업무상 과로로 인한 사망, 돌연사 등은 집계 자체가 불가능하다.

급격한 기온 변화가 뇌출혈 등의 돌연사를 유발하므로 건강관리에 취약한 데다 기온 변화에 그대로 노출된 채 일할 수 밖에 없는 이동노동자들은 돌연사의 위험이 가장 높은 계층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전국의 이동노동자 쉼터에는 코로나 이전, 하루 평균 40~80명에 이르는 이동노동자들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전국의 이동노동자 쉼터에서 월 1회 이상 실시되던 건강검진을 큰 폭으로 확대한다면, 숨은 위험군을 조기에 발견하여 이동노동자들의 과로사 예방에 기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근거다. 



이 기사는 21년 3월에 오마이뉴스에서 주요기사로 다뤄졌고 이동노동자쉼터도 전국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였습니다만, 23년 10월 현재 서울지역에서는 도리어 이동노동자 쉼터들이 폐쇄되거나 예산 축소 등으로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어 관계자들의 걱정이 큰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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