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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글방 Aug 09. 2021

HELL과 HELLO의 세계

[단비글] '섬'

한 남자가 있다. 구조조정, 불어나는 빚. '헬조선'을 한껏 느낀 그는 서울 명소 한강에 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실패했지만. 한강은 그에게 죽음을 허락해주지 않았고, 그는 한강 한복판 새들의 섬, 밤섬에 표류한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척은 윌슨이라도 있었지,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오리배를 윌슨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2억 빚을 갚기보다 마음편한 밤섬에 표류하기로 결정한 남자. 그가 지나가는 크루즈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쓴 'HELP'는 'HELL(지옥)'에 'O' 하나를 덧붙인 'HELLO(안녕)'가 된다.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정말 부지런히 산다. 당시 전국을 지배하고 있던 미니홈피도 열심히 관리하고, 웬만한 사무직은 하기 힘든 1만보를 매일 런닝머신 위에서 걷는다. 달사진 찍기라는 낭만적인 취미가 있는 그녀는 3년 동안 자신의 방에서 나간 적이 없다. 발달한 현대 사회의 서비스 시스템은 그녀가 방안에서만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없는 편안함을 줬다. 달 사진을 찍으려고 망원 렌즈에 눈을 가져다 댄 그녀는 렌즈 너머 밤섬에 이상한 남자를 발견한다.


▲ 영화 '김씨 표류기'의 해외 포스터. 국내 포스터는 도저히.... 도저히..... 이 글에는 못 쓰겠더라... ⓒ 반짝반짝영화사


영화 <김씨 표류기>는 코믹한 B급 감성 포스터때문에 묻힌 수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이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잘 짜인 시나리오와 도심 속 표류한 두 김 씨를 연기한 두 배우의 열연이다. 밤섬 김씨는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스스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고 한강 위 무인도인 밤섬에 표류한다. 생산보다는 잔류를 택한 밤섬 니트족이다. 외롭고 마음이 아파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방 속 김씨는 쓰레기로 가득해 누가 봐도 생활하기 좋은 방이 아닌 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평안함을 느낀다. 사방에 물은 없지만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은둔형 외톨이가 된 방 속 김씨는 관계의 무인도에 스스로를 가뒀다.


사회적·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어렸을 적부터 쌓아온 관계를 스스로 끊고 고립되는 게 관계의 무인도라면, 또다른 한강 섬 여의도 건너편에 있는 노량진도 관계의 무인도라고 할 수 있다. 2년 전, 그곳에 살면서 취업 준비를 할 때 만난 이들이 그랬다. 그들의 인간관계는 대부분 협소했다. 특히 취업이 안 돼 노량진으로 들어오고, 공무원 시험에도 계속 낙방한 장수생은 더 그랬다. 한 장수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정말 공무원이 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30대에 경력 없는 무직자가 할 수 있는 번듯한 직업이 공무원밖에 없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이 짓을 한다고.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친했던 동네 친구 3명이 있었지만, 그들과 연락을 아예 끊은 지는 2년 정도 됐다고 했다. 


2020년 11월 <국민일보>는 청소년정책연구원의 연구보고서를 토대로 한국에 이처럼 관계의 무인도에 갇힌 은둔형 외톨이 청년 13만에서 30만 명 정도가 산다고 추산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학업과 취업활동을 포기한 니트족이 43만 6천명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대학 교육이라는 고등교육을 받았음에도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해 '관계의 무인도'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사회는 물론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도 좋을 게 없다.


<김씨 표류기>의 결말은 이렇다. 밤섬 김씨는 군인에게 발견된다. 그는 밤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밤섬은 무인도여야 하기 때문에 강제로 끌려나온다. 밤섬 김씨에게 남은 건 이자까지 붙어 불어난 빚과 밤섬에서 생활하며 탄탄해진 몸 정도밖에 없었다. 그의 세계는 안녕(HELLO)에서 다시 지옥(HELL)으로 변한다. 밤섬 김씨는 또 자살을 꾀한다. 방속 김씨는 밤섬 김씨가 쫓겨나는 걸 망원경으로 보고, 3년 만에 문 밖을 나선다. 밤섬과 방속에서 관계를 맺고 연대했던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마주하며 희망을 되찾는다. 점점 늘어가는 지옥 속 관계의 무인도 표류자들을 희망의 세계로 끌어내기 위한 가장 좋은 출발은 이것이다. 서로에게 인사하고, 감정을 나누고, 연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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