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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고 고요하게 문어 삶기

by 그린토마토

"여보, 통영에 사는 친구가 이번에도 문어를 보냈대."


해마다 우리 집에 문어를 보내주는 남편의 친구가 있다. 올해도 남편의 친구는 어김없이 문어를 보냈다. 남편은 1박 2일 택배차를 타고 온 스티로폼 상자 속 문어를 열어보았다. 생문어 위에는 얼음이 가득 올려져 있었다. 시골사람이라 생선을 잘 못 먹는 남편은 아이러니하게 문어는 잘 먹는다. 그랬기에 삶기 전부터 기대가 가득했다. 나는 모처럼 쉬는 주말에 문어를 삶아야 하냐며 투덜대었지만 막상 시작하니 문어 삶는 일도 명상하는 일과 비슷하여 편안했다.


문어는 총 열 마리였다. 크고 작은 문어들이 비닐봉지 안에 뭉쳐 있었다. 비닐을 열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문어의 입 쪽에 미역과 해조류 조각이 붙어있는 걸 보곤 더 미안했다. 문어가 생의 마지막에 살기 위해 끝까지 붙들고 있었을 삶의 마지막 조각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도 잠시, 나는 문어의 눈을 떼고 입을 떼고 내장을 뗐다. 그러곤 밀가루와 소금으로 박박 문질렀다. 문어다리 하나하나를 문지른 뒤 깨끗이 씻었다. 무, 양파, 대파를 가득 넣은 물도 팔팔 끓였다. 맛술도 제법 부었다. 미리 타이머도 준비했다. 타이머는 삶는 시간을 정확히 지키기 위해 필요했다. 문어는 7분 정도 삶았을 때 껍질도 안 벗겨지고 맛도 좋았다.

팔팔 끓는 물에 문어의 다리 끝을 살짝 담갔다 뺐다. 문어다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는 그렇게 해야 문어 모양이 이쁘다는 블로그 글을 보아서 그대로 했다. 정말 다리 끝이 이쁘게 말려 올라갔다. 나는 몇 번 그렇게 한 뒤 문어를 물속에 푹 넣었다. 그리고 타이머 7분을 맞췄다. 타이머가 울리면 빠르게 건져 찬물에 헹구었다. 그래야 식감이 좋다는 리뷰를 보았다. 유튜브와 블로그 글 등을 안 보고는 요리도 못하는 세상이다.


열 마리를 삶으려면 칠십 분을 꼬박 지키고 있어야 했다. 아직 많이 덥지 않은 날씨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댁 어르신들은 이가 안 좋아 문어를 잘 못 드신다. 엄마는 아직 문어를 잘 드시니 크고 좋은 문어 세 마리를 엄마 몫으로 찜했다. 다리가 튼튼하고 굵은 문어 세 마리를 삶고 식힌 뒤 지퍼백으로 밀봉했다. 그리고 봉지 위에 '친정문어'라고 크게 적어두었다. 다음에 친정 갈 때 까먹지 말고 잘 챙겨가야지.

그렇게 한참 문어를 다 삶고 나서 보니 싱크대 구석구석 문어 먹물도 튀고 밀가루도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능숙하지 못한 주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부엌을 정리하고 문어를 무사히 다 삶은 뒤 한 마리를 잘라먹었다. 시골 어머님이 손수 짜주신 참기름에 소금을 조금 넣어 기름장을 만들었다. 문어를 기름장에 찍어먹었다. 식감이 좋았다. 나도 제법 문어숙회 전문가가 되었다는 생각에 혼자 뿌듯했다.


열 마리 문어를 손질하고 삶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빠르게 손질하는 음식만 준비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천천히 문어숙회를 만들었더니 기분이 묘하다. 음식이 사람의 마음에 여유를 주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느리고 고요하게 가는 시간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먼바다에서 온 문어가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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