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남편은 레몬이 간에 좋다는 정보를 계속 얘기했다. 그리고, 어제는 사달라고 졸랐다. 곧이어 레몬을 자르고 냉동보관하는 영상링크를 공유했다. 나는 모른 척했다. 아는 척하는 순간, 내가 하게 될 것 같았다.
남편에게 스스로 알아서 할 거라는 약속을 단단히 받고 레몬을 사주었다.
남편은 새벽배송된 박스 안에서 1킬로그램 레몬을 꺼냈다. 곧이어 레몬 세척을 하겠다며 소매를 걷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보, 베이킹 소다 어디 있어?
-식초는?
-레몬 담을 큰 그릇 없어?
-칼이 왜 이렇게 안 들어, 칼갈이 어디 있어?
-굵은소금은 어디 있더라...
남편은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나는 대답을 해주다가 답답하면 직접 가서 찾아주었다. 그러다가 남편은 출근 시간이 다 되었다며 뒷일을 부탁했다. 그러곤 빠르게 집을 빠져나갔고 레몬보관방법 영상링크를 보냈다. 물론, 남편도 양심상 레몬 한 개를 자르긴 했다. 레몬 두 조각을 넣은 레몬차를 뇌물로 바쳤다. 나는 레몬차 싫어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못 이기는 척 한입 마셨다. 쓴 맛이 났다. 왜 이렇게 써? 하고 슬쩍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가족들이 모두 학교와 직장으로 가버린 뒤 집에 혼자 남아 레몬을 잘랐다. 시큼한 레몬향이 코끝에 닿았다.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차곡차곡 통에 담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빠르게 지나가던 시간이 차분해지면서 느려지는 듯했다. 마음이고요해지는 묘한 느낌도 들었다.
머릿속에 꽉 찼던 조급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레몬차도 한 모금 더 마셨다. 아까보다 좀 더 익숙한 느낌이었다.
레몬을 자르는 시간은 레몬이 주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삶이 급하다는 생각이 들고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말없이 레몬을 잘라보는 것도 좋을 듯 했다. 레몬이 온몸을 바쳐 내게 알려주는 지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