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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토마토 Dec 17. 2024

레몬의 시간

  며칠 전부터 남편은 레몬이 간에 좋다는 정보를 계속 얘기했다. 그리고, 어제는 사달라고 졸랐다. 곧이어 레몬을 자르고 냉동보관하는 영상링크를 공유했다. 나는 모른 척했다. 아는 척하는 순간, 내가 하게 될 것 같았다.

  남편에게 스스로 알아서 할 거라는 약속을 단단히 받고 레몬을 사주었다.

  남편은 새벽배송된 박스 안에서 1킬로그램 레몬을 꺼냈다. 곧이어 레몬 세척을 하겠다며 소매를 걷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여보, 베이킹 소다 어디 있어?

-식초는?

-레몬 담을 큰 그릇 없어?

-칼이 왜 이렇게 안 들어, 칼갈이 어디 있어?

-굵은소금은 어디 있더라...


  남편은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나는 대답을 해주다가 답답하면 직접 가서 찾아주었다. 그러다가 남편은 출근 시간이 다 되었다며 뒷일을 부탁했다. 그러곤 빠르게 집을 빠져나갔고 레몬보관방법 영상링크를 보냈다. 물론, 남편도 양심상 레몬 한 개를 자르긴 했다. 레몬 두 조각을 넣은 레몬차를 뇌물로 바쳤다. 나는 레몬차 싫어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지만 못 이기는 척 한입 마셨다. 쓴 맛이 났다. 왜 이렇게 써? 하고 슬쩍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래도 어쩌랴. 나는 가족들이 모두 학교와 직장으로 가버린 뒤 집에 혼자 남아 레몬을 잘랐다. 시큼한 레몬향이 코끝에 닿았다.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차곡차곡 통에 담는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빠르게 지나가던 시간이 차분해지면서 느려지는 듯했다. 마음이 고요해지는 묘한 느낌도 들었다.

머릿속에 꽉 찼던 조급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레몬차도 한 모금 더 마셨다. 아까보다 좀 더 익숙한 느낌이었다.



  레몬을 자르는 시간은 레몬이 주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삶이 급하다는 생각이 들고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이 들 때 말없이 레몬을 잘라보는 것도 좋을 듯 했다. 레몬이 온몸을 바쳐 내게 알려주는 지혜였다.      


  앞으로 종종 일부러 레몬을 살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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