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고 있던 것을 잃을 때가 있다. 물건이나 사물일 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다. 상실감에 좌절하고 있을 때 그 상실감의 본질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글을 쓰려고 보는데 손톱이 긴게, 거추장스럽다. 손을 뒤집어 햐앟게 긴 손톱을 잘라냈다. '따깍따깍'하고 죽은 세포를 잘랐다. 아무런 아쉬움이 없다. 되려 시원하다. 신체일부가 떨어져 나갔는데도 어떤 것은 속이 후련하고 어떤 것은 나와 별개의 것이었는데도 아쉬움이 가득하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기저귀 한장 가져 온 바 없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등지고 돌아갈 때, 한 평생 함께했던 '육체'마저 놓고 간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온 바 없고, '삶'이라는 놀이를 즐기고 아무것도 없이 돌아갈 운명을 타고 왔다. '본래' 나의 것이란 존재한 바가 없으며 그것은 최초에도 마지막에도 마찬가지다.
예전 '빨대 구멍의 갯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분명 입으로 향하는 구멍과 컵으로 향하는 구멍이 있으니 두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긴 빨대와 짧은 빨대가 모두 빨대라는 공통 범주에 있는 바, 빨대의 길이를 극단적으로 줄이면 '반지'수준으로 줄든 빨대의 구멍이 몇개가 되는가.
하나가 둘로 나눠 보여지는 '착시'는 무엇인가. '늘어난 길이'지 않을까. 여기서 막대기를 세워 중국 북경까지 놓는다면 어쩌면 중국과 이곳이 '그것'을 부르는 이름은 두개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두 개가 됐는가.
본디 과정이란 길면 길수록 처음과 끝을 나누게 되고, 하나였던 것을 둘이라 보게 된다.
빨대의 본질이 '길이' 말고 달라진 바가 없다면 빨대의 구멍은 애초부터 하나다. 지하철 약도는 깔끔한 직사각형이다. 다만 서울 지하철을 '직사각형'으로 만들었을리 만무하다. 그것을 '직사각형'으로 축약할 수 있는 이유는 '본질'이 같을 때 모양을 늘리거나 축소해도 본질이 같다고 보는 수학의 '위상동형' 때문이다.
'중간'을 길게 늘리면 언제나 '입구'와 '출구'가 생긴다. 하나의 점을 길게 늘리면 '시작점'과 '끝점'이 생기고 하나의 직사각형면을 길게 늘리면 난데없이 6개의 면이 생겨난다. 그렇다고 그것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다. '과정'이 길어지만 '망각'에 의해 발생하는 착시다.
'빌린돈'과 '갚는 돈'은 모두 한 가지다. '만남'과 '이별'도 한 가지다. 둘다 음극과 양극으로 한없이 커져가는 대칭 구조다. 다시말해 그것의 합은 '없음'이다. 노자의 사상을 말할 것도 없이 스티븐 호킹 박사는 우주의 모든 양의 에너지와 모든 음의 에너지의 값이 '0'이라고 했다. 고로 내어 넣을 때 아쉬움이 크다면 얻었을 때의 기쁨으로 충분히 보상 받았을 뿐이다.
보상이란 조삼모사처럼 아침에 줄 때와 저녁에 줄 때가 다른 것이 아니다. 아침에 빌리고 저녁에 갚는 일과, 아침에 갚고 저녁에 빌리는 일이나 종국에 '없음'으로 수렴한다.
고로 어떤 이별이 아쉬움이 강하다면 '야속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다. 빌려온 것을 갚을 때는 '빼앗기는 마음'이 아니라 '감사히 잘썼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옳다.
언제나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쓰고 돌려 줄 때는 '깨끗히 잘쓰고 제자리에 둡니다.' 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사람의 마음이 워낙 우둔하여 이미 서운한 마음이 먼저 들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음을 내어 보려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