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과 결과는 빨대의 입구와 출구와 같다. 둘로 보이는 하나의 구멍이다. 그것은 시간과 거리에 의해서 지연됐을 뿐 본래 하나다.
중세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여 세상 끝에 도달하면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끝과 끝으로 보면 언제나 양극단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끝과 끝이 맞물려 이어진다는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고 밝혀졌다. 그들이 끝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처음으로 이어졌다. 2차원에서는 불가능한 끝과 처음이 같다는 모순이 3차원에서는 가능해진다. 같은 방향으로만 이동해도 언젠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모순이 사실되니 사실상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다른 차원으로 생각해야 볼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얼마나 획기적인가 사고방식인가. 차원을 넓게 생각한다는 것은.
왼쪽으로만 이동했는데 오른쪽으로 이동할수 있있는 개념.
차원을 넘어서는 사고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한다.
빨대의 구멍이 둘로 보이듯 '원인'과 '결과'는 사건이 '시간'에 의해 '지연'된 착시일 뿐이다.
파동이냐, 입자냐,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가 중첩되는 이런 모순은 수학으로도 이미 확인되지 않는가.
'양자역학'은 당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물음에
'우주는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오'라는 답이 떠오른다.
삼십대 중반이 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는 '사필귀정'이다. 결국 모든 것은 '정'으로 돌아간다. 방법은 모른다. 그냥 그렇다.
오른쪽을 던진 공은 반드시 오른쪽으로 날아간다. 다만 차원을 더 넓게 보자면 오른쪽으로만 던져도 '지구적 입장'에서는 왼쪽에 더 가까이 가는 셈이다. 다시말해서 오른쪽으로 던지던 왼쪽으로 던지던 그것은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왼쪽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결국'은 도달한다,는 믿음이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가면 인도를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항해를 시작했다. 물론 그가 찾은 대륙은 인도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추론은 맞은 셈이다. 동쪽에 있는 인도를 만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하는 바보스러움이 때로는 황당한 개념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에 의해 지연된 '착시'를 만들어 낼 뿐이다. 결과는 같다.
중요한 것은 모로가도 '도달'할 수 있다는 '아주 강력한 믿음'이다. 그 믿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속성을 갖게 해준다. 끊임없이 의심하다 뒤로 돌아간다면 미대륙은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곳이 반드시 그곳에 있다'는 강력한 믿음만이 의심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시간'이라는 방해물이 반드시 가로막는다.
'시간'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커다란 방해물이지만,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경쟁자를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해준다.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떠올려 보면 그렇다. 이 경기에서는 토끼는 승리 거뒀다. 다만 토끼의 수명은 5년, 거북이의 수명은 12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거북이의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토끼에게 거북이와의 경기는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다만 거북이에게 토끼와의 경주는 이미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시기 지난 패배에 가깝다.
다시말해서 인공지능의 승부와 같이 거북이는 더 오래 살아감으로써, '토끼'라는 경쟁자를 '시간'으로 필터링했다. 대략 거북이가 10살이 된 해에 토끼라는 경쟁자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두서 없이 쓰고 마무리 짓는 글이지만 그렇다. 시간이라는 무서운 장벽은 내가 넘어서는 순간, 경쟁자 수백을 걸고 넘어 뜨리는 필터가 되어준다.
빨대의 입구가 출구와 정확히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에 맡기고 시간을 따라 계속해서 하던 일을 진행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