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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글, 혼자 있는 시간은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가_혼

by 오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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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최대 장점이란 읽는자'스스로'를 좋은 환경에 두게 한다는 것이다. 책은 나를 그런 환경에 두도록 한다. 고주망태하여 흐트러진 나를 받아주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와 차분한 감정을 요한다. 뱉기 바빴던 입을 잠쉬 다물게 하고 상대의 이야기에 몰입하는 습관을 주도록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앉은 자리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비롯해 동서양을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여유를 주도록 하고 같은 책을 읽는 시공간을 다르게 하는 독자 및 작가와 내면적 동기화 상태에 들어가도록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하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조용한 공간에서 혼자 썼을 것이며 '다빈치'도 작업실에서 작업을 할 때, 혼자 묵상하며 설계도를 남겼다. 인간의 상상력은 '심심한 상태'일 때, 최고조에 이른다. 그 누구도 그럴싸한 글을 쓰면서 시덥잖은 농담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아이를 키우면서 지난 10년 간 글을 쓰다보니, '조현 증상'처럼 와해된 언어의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다시 읽어보면 '이게 당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하는 글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칭얼'거리는 아이와 같은 공간에서 글을 쓰는 것은 몹시 어렵다. 아이의 나이 9살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고 읽기 위한 최적의 장소와 시간은 혼자 있는 시간이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가족, 평생을 함께 할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 몰입의 시간에서는 모두 방해꾼이다.



이는 '명상'의 그것과 닮았는데 본질이 '몰입'이라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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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관해 가장 좋아하는 격언은 이렇다.


'생각이 많아지면 글을 쓰고, 생각이 비어지면 글을 읽어라.'


이보다 책과 글에 대해 잘 표현한 말은 없다고 본다.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으면 속이 얹힌다. 정보도 그렇다. 입력만 있고 출력이 없다면 정보는 급체하듯 어딘가에서 얹힌다. 고로 머리가 복잡할 때에는 그것을 '배설'하듯, 글로 '와르르' 쏟아내고 속이 비워 소화가 되면 다시 '우걱우걱' 집어 먹어야 한다.



좋은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책을 읽지 않겠다고 한다면 음식한 점 먹지 않고 배설하겠다는 의지와 같다. 소화는 '배설'만으로 이뤄지지 않고, '취식'만으로도 이뤄지지 않는다. '식사'의 완성이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것이라면 '독서'의 완성도 읽고 소화하고 쓰는 것이다.



'배설'된 '그것'은 반드시 그 주인을 닮았다. 예전 동의보감에는 대변의 빛깔, 냄새, 형태를 통해 몸의 '허실'과 장부의 균형을 판단했다. 사람의 기운이 어떻게 흐르고, 무엇을 잘못 먹었으며, 어떤 병이 움트는지 '남긴 것'을 보면 드러난다고 봤다. 여기에 '주어'를 '책'으로만 바꾸어도 이야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무엇을 읽고, 어떻게 소화했으며, 어떤 마음의 결을 지녔는가가 '배설된 문장'에서 숨김없이 드러난다. 독서는 입력이 아니라 순환이다. 들어오고 머물고 곰삭고 박으로 나오는 과정 전체가 하나의 호흡이다.



매일 같은 양의 글을 축적하며 느끼는 변화도 그렇다. 책을 읽다보면 고구마줄기 캐듯 특정 주제를 찾아 파고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확장된 주제에 따라 글의 분위가와 문체가 달라지고 사고 방식도 달라진다.


'노자'와 '양자역학'을 읽을 때,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이 두가지로 해석하게 된다. 두개인듯 하며 하나이고 하나인 듯하며 두 개인 그 모순의 현상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다 다시 언젠가는 '주식과 투자' 혹은 '경제'에 관한 글을 읽다보면 어떻게 '돈'을 관찰해야 하는가, 하는 현실주의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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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관성 있어야 할 철학에 '일관성이 상실한 듯 글'이 쏟아지듯 나오는 이유도 그렇다. 언젠가 아버지께 비슷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초등학교 저학년 쯤에 했던 질문이다. 분명 아버지는 운전 중 직선 도로를 주행하고 계셨다. 그럼에도 핸들을 '좌'로 '우'로 움직이는 것을 보며 물었다.


안전하고 부드러운 운전을 위해 어느정도의 유격이 존재한다. 고로 직선으로 이동한다고 핸들을 가만히 붙잡고 있으면 직선으로 이동할 수 없다. 좌로 한번 우로 한번 흔들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치 '헤겔'의 정반합 변증법적 전개를 닮았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이랬다'가 어떤 경우에는 '저랬다'하는 꽤 금강경스로운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어쨌던 세상 만물은 멈춰져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진동하고 있으며 진동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않은가.



독서와 글쓰기도 이런 흔들림의 반복 속에서 완성된다.


읽을 때 시야는 넓어지고, 쓸 때 생각은 응축된다. 넓어짐과 응축이 교차하며 사고는 깊어지고 문장은 더 단단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은 인간이 사고를 깊게하고 자신을 회복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다. 책과 글은 그 시간을 만들어주는 가장 확실한 도구이며, 읽고 소화하고 써내는 과정은 고요함 속에서만 비로소 완성된다. 외부의 소음과 타인의 요구는 사고를 산만하게 흩뜨리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흐트러진 정신을 정리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한다.



결국 독서와 글쓰기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행위이고 이는 현대 사회에서 거울을 한번 챙겨보고 외출하는 바와 같다. 자신의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머리는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지, 어디 거울 한번 비춰보지도 않고 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스스로 정돈하고 밖으로 나가는 정도의 절차는 필요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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