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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사이

내가 글쓰기를 전공했더라면

by 유림

어릴 적 어린이집 겸 미술학원을 다녔다. 당시 엄마의 말을 들어보자면, 어린이집이 따로 없었던 그 시절에 미술학원은 엄마들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지금의 어린이집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기억에 없지만 그렇게 어린이집과 같은 미술학원을 다녔고 정확히 어떠한 미술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술은 재미있는 것'이라는 마음을 품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난 미술을 배웠다. 가정집에서 하는 미술학원이었다. 언제나 사람이 많았던 거로 기억된다. 그날은 주제가 상상화였다.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서 흰색 8절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상상. 무언가를 상상해서 그려야 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어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상상화란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동차, 우주에 있는 외계인이 지구에서 사는 것과 같은 그런 상상화였다. 이런 상상은 내가 이런저런 생각하고 있을 때 앞에 옆에 친구들이 하나씩 그려버렸다. 난 그 친구들과 다른 걸 그려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보다 더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을 생각해 내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다. 사실 그 나이에 상상화란 정말 어찌 보면 정해진 답과 같을 수 있는데. 난 미술을 잘하는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생각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정해진 시간 안에 그림은 완성해야 하고 결국, 그날 내가 그린 건 우리 집 앞에 있는 상가였다. 그리고 그곳에 개미들을 그려 넣었다. 사람이 아닌 개미가 사는 곳. 그렇지만 집 앞 상가와 똑같은 실물. 그리면서도 자신이 없어 상가를 정말 작게 그려 넣었다. 그날의 8절 도화지는 전지만큼 컸고, 내가 그린 그림은 개미만큼 작았다. 당시 선생님은 기억력이 좋다며 어쩜 그렇게 똑같이 그렸냐며 칭찬하셨지만, 그날 상상을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난 창의력이 필요한 미술은 절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언제 미술학원을 그만뒀는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은 흘러버렸고, 어느새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다. 한창 친구가 좋을 나이. 당시 친하게 지내던 동네 친구 두 명이 있었다. 그 친구 둘은 모두 같은 미술학원을 다였다. 그날도 친구가 잠시 미술학원에 들려야 한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친구가 미술학원을 들어가면서 문이 열었고, 난 친구 뒤를 쫄래 따라 미술학원에 들어갔다. 그곳은 어릴 적 상을 펴놓고 친구들과 둘러앉아 그림을 그리던 그런 풍경과는 달랐다. 낯선 석고상들과 정물들이 정리되어 있었고, 몇 언니 오빠들이 의자에 앉아 이젤을 펴고 정리된 정물들을 그리고 있었다. 언니의 그림을 봐주시고 계신 선생님은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난 옆에서 미술학원을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며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깜짝 놀랐다. 처음 보는 것 같은 사람인데 내 이름을 어찌 알고 있을까. 알고 보니 선생님은 내가 어릴 적 다녔던 가정 미술학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다가 지금의 학원을 운영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어릴 때의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선생님의 눈에는 내가 그림을 잘 그려서 나중에 미술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계셨다고 한다. 내가 미술을 잘하는 아이였다고? 몇 년이 흘렀지만 그럼에도 나를 기억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니, 어린 나이의 난 그 말을 신뢰하고 싶었다. 그때부터 난 미술을 잘하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니 친구들은 하나 둘 대학을 생각했다. 예고를 준비해서 가는 친구들도 생겼고, 이미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알아서 진로를 정한 친구들도 생겨났다. 그들 사이에서 난 공부도 그냥저냥, 다른 것도 그냥저냥 하는 아이로 있었다. 어릴 때 만난 미술 선생님 때문인지 미술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학은 나에게 먼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선 막연하게 미대를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했던 막연한 마음은 정말 나를 미대로 가게 해주었다.


어찌어찌 들어간 미대에서 만난 사람들은 정말 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입시를 겪으며 세상에 잘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대학이라는 곳에 왔을 때는 정말 그것이 거대한 산처럼 느끼게 되었다. 학교에서 나와 사회에 나오고 밖을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더더욱 느꼈다. 그러면서 난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높아졌다. 좋은 것들과 잘난 것들만 보다가 내 안으로 들어왔을 때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면서 힘들었다. 처음엔 그런 나를 다독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차이는 점점 커져만 갔다. 어느새 너무 멀어져 버린 그 차이는 줄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보다 그냥 흘러가게 두는 것이 편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밖으로 밖으로 그렇게 돌아다녔다.


뭐라도 꺼내야 했다. 난 그런 사람이었다. 내 안의 무엇이라도 꺼내야 했던 나는 그림 대신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날이 많아지면서, 대신 글을 썼다. 일기 혹은 글이라고 말하기 민망한 짧은 문장이었지만, 난 문장을 끄적였다. 그림을 그릴 때와 달리 문장을 쓰면서 자유롭다고 느꼈다. 그림을 그리려고 하면 내 안의 검열자가 너무 심한 기준으로 나를 자꾸 통제하려 했다. 반면 글을 쓸 때는 검열자가 사라졌다. 내 안의 검열자는 오직 그림에게만 엄격하였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그도 그것밖에 모른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른다. 다른 것을 해도 검열자는 나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렇게 써도 괜찮았다.


내가 그림이 아닌 글을 전공했더라면 어땠을까. 글 쓰는 검열자가 생기고 그림을 그릴 때는 자유를 주었으려나. 이래 저래 둘 중 하나만 알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인가 표현하고 싶어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라도 자유가 있으니 말이다.



무제1.jpg 만약 글을 전공했더라면 아마 난 그림을 자유롭게 그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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