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빌리엘리어트>를 통해 본 뮤지컬장르의 특성
빌리엘리어트 (2005, 한국 라이선스 2010)
2000년에 나온 <빌리엘리어트>라는 영화를 다들 기억하실겁니다. 1980년대 영국의 광부파업시대를 배경으로,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빌리라는 소년이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나가는 내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었던 영화죠. 이 영화가 최초로 칸 영화에서 상영되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앨튼존은 이미 자연스럽게 음악과 연결되어 있는 이 영화의 스토리에 자신의 곡을 입혀 뮤지컬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영화의 제작진들과 이 아이디어에 대한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나눴고, 몇 년 후 영화 제작사였던 워킹타이틀과 올드비프로덕션은 뮤지컬 제작에 착수합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5년, 웨스트엔드의 빅토리아팰리스시어터에서 뮤지컬 <빌리엘리어트>가 정식으로 상연되기 시작했고, 이 뮤지컬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10년이 넘도록 2016년까지 계속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놀랍게도 2010년 우리나라에서도 비영어권 최초로 라이센스 공연이 상연되었고, 지난 2017년에 재연이 올라오면서 두 번의 상연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 8월, 세번째 상연이 시작됐죠.
뮤지컬 <빌리엘리어트>는 뮤지컬 장르의 특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하고 좋은 예시입니다. 뮤지컬 작품은 별도의 원작을 기초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빌리엘리어트>는 영화 원작을 만들었던 제작진이 뮤지컬 프로덕션에 그대로 합류했고, 원작인 영화의 의도를 이어가면서도 어떤 장면을 어떻게 표현할 지 선택함으로서 관객이 이야기와 주제에 더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이들이 영화컨텐츠를 뮤지컬로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창작진과의 시너지가 작동하며, 같은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됩니다. 영화는 비교적 담담하게 빌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공간을 그리며 빌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감정과 의지를 추측하며 빌리를 따라가는 편입니다. 뮤지컬은 빌리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장치를 보다 많이 마련했고, 빌리 말고도 다른 캐릭터의 내면도 역할을 하는 배우가 스스로 표현하게 하면서 캐릭터간의 갈등과 각 캐릭터가 놓여져 있는 공간을 교차시켜 발생하는 균열을, 마음이 모이는 순간과 흩어지는 순간을 훨씬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동시에 표현의 효과성 자체도 캐릭터 각자의 견고한 개성을 보여주죠.
뮤지컬 빌리엘리어트는 영화와 동일한 시간의 흐름을 갖고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영화가 당시 영국 광산 지역의 풍경을 관조적으로, 되도록이면 넓은 시야로 고루 조명한다면 뮤지컬은 장르가 갖고 있는 공간과 시간의 한계 때문에 훨씬 더 선택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빌리엘리어트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려줍니다. 우리는 직접 자신의 말을 하는 빌리도 만나지만, 아이라는 한계와 본인 스스로의 재능 때문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까지도 춤과 노래로 표현하는 빌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광부들이 처한 환경의 비정함과 진지함이 묵직하게 전면에 드러나고, 빌리의 재능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빌리의 할머니 이야기도 뮤지컬의 한 씬을 차지합니다. 영화에 비해 발레 선생님인 미세스 윌킨슨과 그의 딸인 데비의 이야기는 간추려진 느낌이 나지만 그 때문에 주인인 빌리의 눈에 미세스 윌킨슨은 어떤 의미가 되는 지는 더 도드라집니다. 빌리의 친구인 마이클의 이야기와 둘 사이의 교감 역시 뮤지컬 1막의 중간에 인상깊은 장면으로 자리하면서, 둘의 관계를 즐겁고 진지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줍니다. 빌리의 아버지는 특별히 단독넘버를 부여받지는 않았습니다만 그에게도 마이크가 한 번은 쥐어지죠. 특히 빌리의 아버지는 전체 인물들 중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변하는 인물입니다. 빌리의 엄마 이야기는 빌리의 입을 통해서 전해집니다. 현실에는 없는 인물이지만 빌리의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하는 인물이기에, 배우의 몸을 빌려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빌리에게 반사된 엄마의 모습이지요. 현실의 우리는 마음의 크기나 공간을 눈에 보이게 그려낼 수 없지만, 뮤지컬은 이렇게 물리적인 시간과 음악을 통해서, 그리고 무대 전체를 어떤 인물에게 내어줌으로서, 물리적인 크기가 아닌 마음의 크기,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의 크기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의 무대와 관계를 바라볼 수 있는 강력한 장치들을 갖고 있습니다.
공동체에 좀처럼 적응하기 어렵고, 공동체의 요구를 그저 따를 수만은 없어 괴로운 사람들은 이 극안의 빌리에게 주어진 고통과 행운을 동시에 바라보게 됩니다. 한 편, 스스로는 공동체에 쉽게 적응하지만, 나와는 다른 이질적인 존재를 불편하게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도 이입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또 본의 아니게 예술을 그저 사치스러운 어떤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에도 경종을 울립니다.
물리적인 제한이 분명히 존재하는 무대에서 캐릭터의 내면과 바깥의 세계가 한 테이크 안에서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은 경이롭습니다. 카메라로 찍어낸 여러장면을 이어붙인 것이 아니고, 무대 안에서 세계가 뒤섞여 펼쳐집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1막 중반의 Solidarity(연대)라는 넘버 장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뮤지컬의 이상향에 가깝다고 느낍니다.
1막의 중반, 무대에 거의 모든 연기자가 오릅니다. 사실 관객으로서는 어디에 집중해서 시선을 둬야할 지 곤란함이 느껴지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경찰로 상징되는 법과 제도는 빌리의 체육활동을 보장하지만, 광부들의 일자리는 보호하지 못합니다. 발레수업을 가다가 쭉 늘어선 경찰들을 보게 된 빌리는 한 경찰에게 묻습니다. "뭘 하시는 거에요?" 경찰은 답합니다. "지키는 거란다!" 빌리는 "무엇을요?"라고 다시 묻습니다. 경찰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화를".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넘버와 씬은 관객 모두에게 이것을 묻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같이 손을 잡고" 지키려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이 장면은 우리가 이렇게 같이 손을 잡고 지키고자 하는 많은 것들 중 중요한 한가지를 보여줍니다. 어른들이 이유도 모른 채, 혹은 생존 자체를 위해 열심히 대치하고 싸우며 피흘리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자랍니다. 전쟁 중에도 아이들은 자라죠. 하지만 아이들은 싸움 자체로 자라지는 않습니다. 이런 싸움들이 지켜낸 공간에서 자랍니다. 부모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예술과 교육은 이렇게 그들의 아이들에게 스며듭니다. 그렇게 이 뮤지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는 장면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법이 보호하는 것과 억압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광부라는 노동자계층의 연대와 동질성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과 어떤 가치는 억압하는 것을 봅니다. 파업광부들의 연대는 그들 자신의 생존은 보장하지만, 개인의 개성은 보호하기 어렵습니다. 법이 그들의 생존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현실을 맞이하는 개인이 갈등하고 버거워지는 것은 현실입니다. 아버지 몰래 권투교실 대신 발레교실에 가는 빌리의 행동은 다분히 일탈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국유화의 희생자인 광부들은 취약하지만, 그 공동체 안에서도 더 취약한 계급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더 취약한 아이들은 미래의 가능성 때문에 종종 법과 제도의 보호를 받습니다.
1980년대 영국의 더럼이라는 뚜렷한 지역색을 갖고 있는 이야기가 이역만리 한국땅에서도 빛을 발하는 이야기가 되는 건 신기합니다. 제가 살아본 곳, 살아본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이 극의 지역색을 확장해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이긴 합니다만 1980년대라면, 우리나라도 '질서'같은 이유로 한 지역을 억압하고 그리고 여러 개인의 권리와 인생을 박탈한 부조리한 경험을 갖고 있고, 아직까지도 계속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뮤지컬은 긴장과 이완을 반복합니다. 단순히 시대와 분위기를 전달하는 장면도 있지만, 인물간 또는 집단간의 갈등의 긴장이 높아졌다가, 잠시 쉬면서 이완되었다가 다시 어떤 계기로 긴장이 상승하며 폭발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고독과 공동체안의 교류와 마음의 소통 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이렇게 누적된 긴장은 어느 새 폭발의 순간에 이르고 이 폭발을 수습하고 갈등이 해결되면서 (정확히 말하면 일부 갈등은 해결되고, 일부갈등은 타협하고, 일부 갈등은 버려둔 채로) 극이 끝납니다. 그리고 극은 이야기의 목격자인 관객의 시선을 통해 거기서 멈출수도, 좀 더 나아갈 수도, 뒤로 퇴보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감독의 시선'을 통해 빌리를 봅니다. 우리가 빌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독의 시선을 통과해야만 하죠. 이 이야기가 뮤지컬 장르로 오게 되면, 우리는 퍼포머가 만들어낸 최종 결과물을 봅니다. 다시 말해 '빌리'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연기자 본인의 시선을 통해, 그의 몸과 목소리를 통해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객석의 사람들에게 전달해야하기 때문에 엄청난 에너지를 끌어올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춥니다. 일부 대사로 밖에 보여지지 않았던, 그 작은 몸에 담겨져 있던 어린 10대 소년의 마음과 열정을 춤과 노래를 통해 전달받는 일은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는 '관조'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뮤지컬에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계속 팔짱끼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때에는 고요하고 어느 때에는 폭발하는 '실재'의 파워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거대한 드레스가 만들어내는 바람과 부피, 무대 위의 음식이 그릇에 담겨지는 소리와 냄새, 빌리의 발과 무대 바닥이 마찰하며 만들어내는 마찰음과 빌리의 격한 호흡, 흘러내리는 땀냄새, 이 모든 게 '실재'의 경험이지요. 영화에서라면 이러한 '실재'에 관한 요구와 부담은 감독의 욕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뮤지컬 무대에서는 이 모든 게 반드시 '실재'해야만 합니다. 모든 과정이 최대한 통제되고 안전할 수 있도록 충분히 사전작업을 하겠지만, 일단 무대가 열리면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죠. 열린 무대를 감독이 일일이 통제할 수 없다는 건 중요한 차이를 낳습니다. 뮤지컬은 퍼포머가 최종본을 만들어내는 퍼포머의 예술이지요. 그래서 연기자들 자신의 훈련수준도 매우 중요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에 다한 판단력과 무대 위에서의 견고한 결단도 종종 필요합니다. 다른 연기자들과의 조율과 타협, 앙상블도 매우 중요한 요소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