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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블링 Apr 26. 2022

01 엄마가 된 수학 선생님

그렇게 수학에 관심많은 엄마가 되었다.

“선생님!! 선생님!!” 버스에 오르자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친다. 

‘아침부터 누가 매너없이??’ 눈살이 찌푸려 질만큼의 데시벨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홱 돌아간다.

본 듯한 아이가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다. 아, 3반 민서구나! 새 학기지만 유난히 수업시간에 적극적이었던 아이라 한 눈에 알아 보았다. 

새삼스레 설레고 벅차다. 드디어 내가 선생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노량진에서 안 가본 식권밥집이 없을 정도로 고시 바닥에서 구르다가 천신만고 끝에,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첫 해는 선배들이 꿀이라고 이야기하는 2학년 문과반 수업을 맡았다. 왜 꿀이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은 참으로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열심히 들어 주고 웃어주고 호응해 주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선생님, 예뻐요~”라는 주문을 ‘안녕하세요’ 대신 인사말처럼 외쳐주곤 했다. 교사들은 주로 이렇게 착한 아이들에 의해 의도치 않게 불치병에 걸리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여고의 젊은 남교사, 남고의 젊은 여교사들은.     


초보 교사가 지향하는 수업 컨셉은 ‘쉬운 수학’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받아 온 그런 딱딱하고 재미없는 수업은 절대 하지 않으리라 결심을 해온 세월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온 것이었다. 이런 저런 재미있는 얘기를 하다가 결정적으로 수학개념과 딱! 연결 시키는 방법으로 수업을 끌어가는, 아주 전략적인 수업을 계획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2000년대의 대학생들은 미팅이라는 걸 했다. 미팅이라는 것에는 참석하는 사람의 머리 수를 맞추고 장소를 선정하는 주선자가 있게 마련이다. 미팅의 목적이 남녀간의 짝을 찾는 것인지라 마지막 순서는 항상 마음에 드는 사람을 지목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 때 상대방을 지목할 때는 반드시 한 명씩만 지목 하는 것이 룰이다. 주선자라고 해서, 그 테이블을 다 계산한다고 해서, 연예인급 외모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두 명을 지목할 수는 없다. 이것이 미팅의 룰이자, 함수의 룰이다. 즉, 함수는 정의역의 원소 하나에서 공역의 원소 하나만 연결할 수 있다.

 ‘대학생’,‘미팅’. 단어만 들어도 잠이 깨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초 집중하여 듣고 있던 아이들은 ‘함수’ 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아이~ 뭐야~”하는 야유와 함께 시선을 칠판에서 거두었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그 다음 시간도, 또 그 다음 시간도 열심히 낚아댔고,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기꺼이 낚이면서도 수학과 닿는 부분이 되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착한 아이들의 따뜻한 관심에 단 하나 빠져 있는 것이 있다고 하면 바로 ‘수학’이었다. 게다가 반전스럽게도 내 담당과목은 수학이었고. 


아이들에게 수학시간은 힘든 시간이었다. 시험이 끝난, 방학 직전의 기간에는 30명 교실에서 아주 착하고 의리 있는 아이 3명만 데리고 수업을 한 적도 있다. 초보교사는 본인의 역량 탓인가 생각하며 많이도 자책했고 유명 인터넷 강의도 일 년치씩 수강하며 수업의 질을 높여보려 애썼다. 노력에 비례해서 수업의 질은 더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선배교사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같은 교사가 보기에도 존경스러운 수준의 선배 선생님 수업에서도 그렇게 방관하는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한 번은 너무 답답해서 대놓고 물어보았다. 

“너희들 도대체 이렇게 수학 공부 안해서 대학은 어떻게 가려고 그러니?” 

그러자 냉큼 몇 아이가 대답을 했다.

“저는 수학 안 해도 되요~” “저도요~ 수학 빼고 내신 챙겨도 전 대학 갈 수 있어요”

“뭐어???”

그 때의 입시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그저 옛날의 ‘국,영,수’ 중심의 공부만이 입시에서 살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미 수학 없이 살아갈 길을 택한 상태였고, 그래서 선생님과의 의리만큼만 수업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문과반이어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동생 같은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미 입시를 1~2년 남겨두고 수학에 등 돌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수학 교사인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농담과 엮은 수학 개념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 그것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5년 후.

나는 결혼을 했고 출산과 육아를 위해 얼마간의 휴직을 했다. 그리고 다시 내 자리에 돌아갈 때 즈음에는 더 이상 학교의 아이들은 나를 큰언니나 동네 이모로 보지 않았다. “선생님, 예뻐요”란 말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약간은 아쉽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객관적인 거리에서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엄마가 되고 나니 학교에서도 집에서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하는 행동마다 너무 예쁜 우리 반 반장의 엉덩이를 토닥이다가 흠칫 놀라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다. 우리집 재이처럼 덩치 작은 아이가 왕따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는 꼴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담당 선생님이 계신데도 필요 이상으로 나서서 아이를 지키곤 했다. 수업시간에도 변화가 생겼다. 더 이상 아이들의 주의를 끌기 위한 낚시 수업은 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설명을 석봉이가 듣고 있다면, 과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인지, 완벽한 이해가 가능한 설명인지를 염두에 두며 수업 준비를 했다.      

아이들을 보는 시선도 바뀌었다. 개념 설명마다 진지하게 끄덕이며 수업을 듣는, 인성마저 완벽한 아이를 보면, 예전에는 ‘내 수업 잘 들어 주는 착한 아이’로 끝났을 테지만 지금은 ‘쟤 어머니는 어떻게 키우셨을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일부러 무시했던, 50분 수업 내내 엎드린 등짝이 이제는 유난히 안타까웠고 그 아이의 과거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엄마가 되고 나니, 진짜 교사가 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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