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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동차 노동자 Apr 28. 2023

수전 브라운밀러《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읽고

급진 페미니즘의 고전을 읽고 느낀 점들


급진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불리는 책이다. 이 책에선 여성에 대한 폭력, 특히 강간 역사를 풍부한 사례를 들며 분석한다.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여성에 대한 강간 기록을 찾는 노력은 매우 헌신적이었다. 저자는 기록 자체에 없거나 강간을 범죄로 보지 않고 남성의 재산권 침해로 간주했던 전(前) 자본주의 시대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초 강간 기록 역시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들춰내며 여성차별에 대한 비판한다.


하지만 1장에서 저자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이 바로 강간이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한참 과도한 비약이다.

그리고 “남성이 자신의 성기를 두려움을 일으키는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은 불의 사용과 돌도끼의 발명과 함께 선사 시대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아야 한다."라며 선사시대 때부터 강간을 통해 남성이 여성을 억압해 온 것처럼 주장한다. 선사시대 인류는 협력하지 않고선 생존 자체가 불투명했다. 이 시대에 여성차별이 존재하지 않았고 여성이 부족 또는 씨족 사회에서 남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모계사회가 수 십 만년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고고학의 발전으로 이미 검증된 이론이다.


이런 협력이 깨지고 여성차별이 시작된 것은 수렵 채집 사회가 농경사회로 바뀌기 시작하며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엥겔스는 이를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 불렀다. 남성이 강간을 통해 여성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가축이 끄는 무거운 쟁기를 다룰 수 있어야 했던 농경사회에서 채집을 주로 담당했던 여성의 노동이 상대적으로 부차화하며 여성의 지위가 하락하기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사회의 생산관계가 각종 차별과 어떤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차별의 근원에 접근해 그 원인을 제거하는 길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하에서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려면 여성과 남성을 적대적인 세력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급진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가  아닌 노동계급의 단결을 추구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가 착취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차별을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그렇지 때문에 차별과 착취는 서로 연결돼 있고 진정한 여성해방을 위해선 여성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단결 즉 계급적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야 말로 여성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라 생각한다. 


이렇듯 저자와 내가 여성차별의 원인을 바라보는 관점은 확연히 다르지만 이 책은 장점 또한 많은 책이다.

전쟁과 강간을 다루는 3장, 폭동과 혁명을 다루는 4장 그리고 미국 역사에 관한 두 가지 사례 인디언과 노예제를 다루는 5장, 인종 문제를 다루는 7장, 여성이 강간을 원한다고? 천박한 이데올로기를 반박한 10장 등은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1, 2차 대전과 베트남 전쟁에서 발생한 강간 범죄의 끔찍함을 잘 다루고 있다. 지배계급이 전쟁 기간 동안 여성의 존엄을 짓밟는 강간 범죄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했는지 풍부한 사례를 들어 잘 분석하고 폭로한다.


1차 대전 당시 주축국 군대나 연합국 군대 모두 강간을 목적의식적으로 자행했다. 독일 군대는 강간을 통해 공포를 부추기고 적국 군대와 그 국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전쟁 초기 강간을 광범위하게 자행했고 또한 자국 군대의 사기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강간을 방치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다는 이유로 운영된 위안부 문제도 이에 포함된다. 지배자들 모두는 경중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여성에 대한 강간을 비밀리에 계획하거나 암묵적으로 용인, 부추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매춘 역시 대부분의 군대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운용했다.


예외적 사례로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군대는 강간이나 여성에 대한 폭력 범죄를 엄격하고 실질적으로 처벌해 강간 사례가 드물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경우 여성들도 동등하게 군사행동에 참여했고 여성과 남성 모두 민족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정의로운 전쟁에서 싸운다는 정치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런 군대에선 당연하게도 여성을 존중받아야 하는 동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전시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강간과 같은 여성차별적인 범죄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반대로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 병사들은 매춘 강간 살생을 저질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이 억지로 끌려온 전쟁에서 왜 싸우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언제 죽을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매춘과 강간에 빠져들었다고 지적한다.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군대와 완전히 대비된다.


이렇듯 침략을 위한 군대에 징집돼 끌려온 군인들이 저지른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을 남성 일반의 본성으로 치부한다면 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 군대의 남성들이 여성을 동등한 존재이자 동지로 함께 싸운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남성 본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 흑인과 아메리카의 선주민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인 강간 문제도 다룬다. 흑인 노예 여성은 이윤 생산의 도구이자 출산의 도구였다. 또한 성 노예처럼 취급당하기도 했다. 출산한 노예 자녀들은 새로운 상품으로 팔려나갔고 주인의 강간으로 인해 출생한 혼혈 노예들은 이중의 차별과 천대를 받았다.


선주민인 인디언들에 대한 폭력과 강간은 그들의 땅을 빼앗기 위해 자행된 의도된 폭력이었고 매우 흔했다. 선주민인 인디언들 역시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자행된 폭력과 강간 등에 맞서 백인에 대한 복수로 강간을 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흑인, 선주민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간 등은 미국 자본주의 역사 발전과정에서 지배계급이 저지른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이지 미국 남성 모두의 이해 때문에 저지른 범죄가 아니다.


이러하듯 전쟁에 임하는 각각의 입장에 따라 여성폭력과 강간 문제가 사회적 현상이란 점을 잘 분석하고 있는듯하지만 결론 부분에 가면  '모든 남성의 근본적 본성' 때문에 강간이 벌어진다고 주장한다. 


강간을 비롯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차별과 범죄에 맞서위 위해선 사회인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에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올다. 강간죄에 대한 처벌을 위해 여성들의 입장에서 조사하고 처벌도 적정 수준으로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주전 브라운 밀러가 책을 집필한 1970년대나 지금이나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강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여성운동이 성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개인적 실천으로 주짓수 등 호신술을 모든 여성들이 배워야 한다는 주장은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이 책이 쓰인 것은 70년대다. 이때 여성에 대한 사회 인식은 대단히 후진적이었다. 특히 진보 좌파 내에서도 후진적이고 모순이 가득했는데 이는 스탈린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런 후진적 인식에 크게 실망한 저자가 여성차별의 문제를 폭력 그중에서도 여성에게 가장 치욕적이고 치명적인 강간을 주제로 여성차별의 근원을 파헤치려 한 시도 자체는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이런 노력의 결과로 적지 않은 성과가 분명히 있었다.

이는 여성의 의지에 반한 강간 등 폭력에 여성의 처신이 문제라는 후진적 의식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를 끌어냈고 여성인권과 운동의 성장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여성차별의 근원을 모든 남성 일반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체계화 시키는 과정에서 논리의 비약과 모순에 빠지기도 한다.


실례로 저자는 11명을 연쇄 살인해 1964년 미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보스턴 교살자로 불리던 앨버트 드살보’ 사건을 분석하며, 드살보가 일반 남성과 별반 다른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드살보의 강간 살인행위를 “강간을 저지른 남성은 사회에서 일탈한 자이거나 ‘순수를 더럽히는 자’가 아니라 사실상 남성의 전위 돌격대로 복무해왔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싸움에 투입된 테러리스트 게릴라이다.”라고 주장하며 모든 남성이 강간범들과 이익을 공유하고 있는 양 주장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너무 과도한 나머지 황당하기까지 하다.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면 여성노동자들이 독립적으로 싸워 승리한 사례들도 적지 않다.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서 승리한 사례도 마찬가지다. 여성, 남성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으로 자본주의에 맞서며 싸울 때 연대의식은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연대의식은 여성에 대한 차별에 맞서는 운동의 발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입증된 바 있다.


물론 저자의 지적처럼 여성차별을 계급을 초월해 자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라면 일상적인 시기든 혁명적 시기든 계급을 초월해 여성차별에 반대해야 한다. 차별받는 여성의 신분이 우선이 아니라 여성차별이 우선이란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처음 출판된 70년 미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러 성과를 만들어냈다. 강간 등 여성에 대한 폭력 범죄에 대한 국가와 사범 당국의 인식을 바꿔가기 시작했고 이런 노력으로 사회 전반에 여성차별과 폭력을 완화시키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처럼 남성 일반에 맞서기 위해 여성 일반이 주짓수를 배우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실효적이지도 않다.

여성차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선 차별 유지에 이해를 깊이 박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을 회피해선 안 된다. 저자도 지적하는 것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간 발생 빈도가 가장 높은 곳이 가난과 차별에 찌든 곳이다. 가난과 차별이 심할수록 이탈한 일부가 희생양을 찾게 된다.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은 전체 노동자들의 단결에 해롭다. 전체 노동자가 단결하지 못하면 기업과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지키는 게 더 용이해진다. 이런 연유로 자본주의 체제에서 여성차별과 더불어 노동 계급의 단결을 어렵게 만드는 온갖 차별(인종, 이주, 비정규직-정규직, 세대간 등)과 이간질이 끝이지 않고 조장된다. 때론 공공연하게 때론 은밀하게 말이다.

따라서 차별에 반대한다면 개인적 실천을 넘어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체제에 맞서야 한다.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성차별 문제를 다룬 고전으로 유명한 이 책은 읽어 볼 만하다. 특히 여성들이 그동안 받아왔던 차별과 천대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22년 3월 18일 

p.s. 퇴고할 시간이 없어 미루고 미루다 이제서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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