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열풍 속에 살아가는 맥시멀 리스트
나의 작은 4평 원룸을 재계약했다. 독립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재계약이라니……. 재계약 과정은 간단했다. 집주인이 먼저 전화를 했고, 내가 재계약 의사를 밝힘으로써 절차가 끝났다. LH지원을 받긴 했지만 묵시적 계약갱신이 가능하므로 따로 처리할 복잡한 과정은 없을 터였다. 계약 내용을 담은 문자까지 주고받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2년 동안 잘 부탁해. 2년 동안 곳곳에 나의 흔적을 담은 작은 방은 무척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책이며 옷가지들이 널브러져 있는 건 당연했고, 며칠 동안 청소기도 안 돌렸더니 머리카락도 바닥에 가득했다. 원체 정리정돈을 못하는 성격에 청소까지 귀찮아한다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술을 먹여봐라, 여행을 해봐라. 다 필요 없다. 그냥 집에 가보면 된다. 분명 들어왔을 땐 깨끗했던 작은 방에 여기저기 곰팡이며 때가 낀 모습에 속이 상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 살아가는데 당연한 과정이라 여겨져 잘 살았구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청소를 했냐고? 베이킹 소다와 식초로 박박 문지르고, 뚫어뻥을 여기저기 들이붓고, 자리를 마련해 책을 정리했지만 전혀 청소한 티가 나지 않았다. 이상적인 모습은 호텔에서 ‘메이크업 룸’을 한 것처럼 뽀-얀 느낌의 방인데, 내 방은 잡동사니가 너무 많아서 애초에 불가능했다. 방 가운데 서서 한 바퀴 둘러보며 생각했다. 나의 실력에 비해 이상이 너무 높다는 걸.
청소 이상이 높아진 건 엄마의 잔소리와 늘어가는 정리정돈 프로그램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집 여자들은 모두 맥시멀리스트라 쑤셔 넣는 건 정말 잘하고, 정리정돈을 못했다. 내 방이나 부모님 방이나 너저분한 건 똑같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늘 나에게 잔소리를 했다. 귀신 나올 것 같다고. 자취방에 와도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게 틀림없다. 엄마는 내 자취방에 딱 두 번 왔다. 이삿날과 내가 술에 쩔어 택시에서 본가주소를 말해버린 날……. 다른 집은 엄마가 언제 올지 몰라 비밀번호도 안 알려준다는데, 우리 부모님은 일단 나가면 신경을 끄는 부류였다. 우린 간헐적 가족이다. 부모님까지 잘 오지 않으니 내 자취방은 급격히 슬럼화되었고, 한때는 발로 물건을 슥슥 밀어야만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신박한 정리’ 같은 정리정돈 프로그램이나, 곤도 마리에의 책을 참 많이 읽었다. 도움이 됐냐고? 둘 다 도움은 안 됐다. 버리기 전 중간 상자를 만든다거나, 물건을 버리기 전 인사하는 습관이 생긴 건 좋았지만……인생이 바뀔 정도로 도움이 되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맥시멀리스트일 수밖에 없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는 곤마리의 정신은 이미 실천 불가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서점, 서울 노원구 태릉입구의 ‘지구불시착’ 사장님은 미니멀리즘이 싫다고 말씀하셨다. 이건 또 새롭군. 싶었다.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맥시멀리스트인 걸 인정했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에 딱히 아무 생각이 없는 쪽이었다. 그리고 집이 너무 좁기 때문에 물건이 많이 보이는 건 당연하다 여겼다. 그런데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나 역시 미니멀리즘을 좇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평 원룸 안에서도 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해 안달나있었다. 이미 사놓은 물건을 언젠가 당근 하겠지 싶어 애정을 주지 못하고, 책은 다시 팔 수 있으니 깨끗이 읽어야 해!라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나. 사장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나이를 먹으면 웬만해선 4평 원룸보다 넓은 집에 갈 텐데, 4평 원룸의 물건에 정을 주지 못하면 그보다 넓은 집에서 물건 관리를 어떻게 하지? 정을 주지 않는다는 건 늘 새로운 물건을 탐한다는 얘기다. 우리 집에 있는 커피 메이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지 못한다. 전날 저녁에 내려놓고 냉침하는데, 어차피 저녁엔 커피를 마시지 않으므로 크게 불편하진 않다. 그런데 자꾸 저 녀석을 팔아버리고 아이스도 되는 커피메이커를 새로 들이자라고 생각을 하면, 지금 이 상황에 불만족하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지금 가지고 있는 책에 정을 주고 열심히 읽지 않으면, 늘 새 책을 탐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한동안 책 구매 중독에 빠졌는 지도 모르겠다.
4평 원룸 안에 내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좁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물건을 비우는 것도 좋지만 좋아하는 물건을 채워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걸 2년 동안 배웠다. 재계약한 2년 동안 어떤 물건을 비우고 어떤 물건을 채우게 될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