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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노 Jan 24. 2022

전생의 누군가의 버릇



 아무리 달려도 0.3초의 시간을 넘길 수 없었다. 기록을 경신하지 못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나갔고 마음이 초조할수록 출발선에서 가벼웠던 발은 결승선을 앞두고서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하루하루 트랙 위에 서 있는 게 버거웠다.


매미가 정신없이 울어댔다. 황갈색 모래가 깔린 운동장이 핑핑 돌았다.

S는 허리를 굽히고 양팔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가쁜 숨을 토해냈다. 심장은 마치 빨리 감기는 테이프처럼 쉴 새 없이 헐떡였다. 가쁜 숨 사이 한 번씩 깊게 내뱉는 숨으로 심장을 되감았다.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숨을 고르고 허리를 치켜드니, 코치 선생님이 계신 뒤쪽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토록 운동장 가에 서서 숨만 내뱉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마주쳐야 할 순간이 온다. '그 순간'이 있다. '마주쳐야 할'. 그것이 순간일지, 영원 일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그때가 있는 것은 맞다.

애써 뒤로 돌아가던 심장이 다시 헐떡인다. S는 오른손으로 코밑을 훔치며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코치 선생님은 차트에 무언가 적어 넣으며 살짝 고개를 젓는다.

 순간은 지났다. 하지만 지금 감정은 순간에 기록되어 영원처럼 남을 것이다. 그렇게 순간은 영원히 되어 살아간다.


S는 끌리는 걸음으로 묵묵히 벤치에 놓아둔 가방과 운동화를 손에 쥐었다. 운동장을 빠져나오는데 뒤에서  S에게 소리치는 무언가를 들었지만, 그냥 못 들은 체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누군가,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재능이 있어, 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고 응원을 해주어도 괜히 네까짓 게 뭘 알아, 라며 못나게 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렸을 적엔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짜증이 나면 짜증이 난대로, 딱히 목적도 없는 괜한 심술을 마구 부리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걸로 만족했던 때가.


하지만 S는 이제 중학생이 되어서 더는 어린애처럼 행동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더 정확히는 다섯 살 터울의 막냇동생이 개울에 빠져나오지 못한 그 해, 장례가 끝나고서 정신을 놓은 것처럼 온 집안을 뒤집으며 청소하던 어머니를 말리지 못했던 그날. 마당으로 나있는 유리창에 아직 선명히 찍혀 있던 동생의 손바닥 자국을 본 그때. 그 완두콩 같은 작고 선명한 손가락 자국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보았던 그 순간부터.

S는 고개를 꾹 누르고 수영장 옆에 딸린 샤워실로 향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문고리가 열리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라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S는 발로 쾅, 문을 차 버렸다. 되는 일이 없었다.

 살펴보니 수영장 문도 잠겨 있었다. 매미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와 우는 것처럼 맴맴거렸다.


어쩐지 매미소리를 들으니 땀 냄새가 더 올라오는 것 같았다.

"너도 몰래 수영하러 왔어?" 뒤에서 여자애 목소리가 들린다. "이리 와, 이쪽으로." 여자애는 앞서더니 능숙하게 수영장 뒤편 작은 쪽문을 열어젖힌다. 등을 둥글게 말고 쪽문 안으로 쏙 사라지더니, 다시 고개만 빼꼼히 나온다. "안 들어와? 수영하러 온 거 아녔어?" 여자애는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대답은 듣지도 않고선 머리마저 다시 사라져 버린다.

S는 주춤거리다가 여자애를 따라 쪽문으로 따라 들어갔다.





락스 냄새가 코를 확 찔렀다.

그다음은 온통 파란색이었다. 불 꺼진 천장도, 벽도, 바닥도, 물도 모두가 파란색이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물은 그림처럼 정체되어 있었다.

 S는 쪽문 하나로 매미가 울어대던 황토색 나라에서 멀어졌다는 것이 신기했다. 세계가 바뀌는 것도 순간이었다.

앞서 들어온 여자애가 갑자기 윗옷을 훌러덩 벗는다. 야, 이 계집애야! S가 놀라 휙 손을 들어 눈을 가리지만 여자애는 도리어 놀란 S를 돌아보며 씩 웃는다. 살짝 손을 내리니 여자애는 옷 안에 이미 감색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채였다.


"바보 같네!" 여자애는 혀를 삐쭉 내밀더니 다시 씩 웃어 보였다. S는 처음 보는 여자애에게 놀림당했지만 심장이 콩닥거려 화를 낼 수 없었다.

풍덩! 여자애가 물로 뛰어들었다. 여자애는 물속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놀렸다. S가 없었어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그것은 반대로 S가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여자애는 그렇게 물속에서 시간을 보내더니 쑥물 밖으로 나왔다. 감색 원피스 수영복은 새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제 기능을 충실히 해냈다.


'그' 제 기능을 충실히 하는 딱 붙은 수영복이 만지는 모든 굴곡에서 차가운 물이 똑똑 떨어졌다.

"뭐해?" 여자애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S는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났다. 여자애는 흐음, 하다가 이제야 S를 처음 보는 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뭔가 결말 없이 휙 몸을 돌려 레인 끝에 섰다. "그럼 구경이나 해!" 여자애는 다시 또 아까처럼 웃었다. 세 번째 봐서 그런가, S는 그 웃는 모습이 여자애와 완벽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때 여자애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하얀 거품이 일고 사방으로 튀어나간 거품은 아래로 떨어졌다. 소리는 요란하지 않았다. 오히려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더욱 도드라졌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들이었다. 정교하게 짜 맞춰진 톱니바퀴처럼 손끝부터 매끄러운 팔꿈치를 지나 유연한 어깨를 넘어 탄탄한 종아리에서 힘찬 발끝까지 이어졌다.

S는 수영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지만, 여자애의 동작이 얼마나 훌륭한 지는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미술에 무지한 사람이라도 오랜 세월을 지닌 명화 앞에서 절로 감동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편 레일에 도착한 여자애의 머리가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오우시(雄牛)! 그거 너 맞지?" 여자애가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S를 돌아봤다.


S도 자기의 별명을 알고 있었다. 출발선에서 왼발로 땅을 구르는 버릇 때문에 어느샌가 그런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버릇을 고치기는 어려웠다. 그건 긴장되면 나오는 이상한 버릇이었다. 어쩌면 그 버릇은 S의 버릇이 아니고, 전생의 누군가의 버릇 일지 모른다고 믿었다. 자기라면 절대 그런 바보 같은 짓은 안 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여자애는 매끄럽게 쑥 올라와 레인 끝에 걸 터 앉았다. "어딘가 낯익다고 생각했거든." 여자애도 S처럼 긴 숨을 한 번에 내뱉었다. "너 유명하잖아. 육상 유망주라고 말이야."

여자애 말을 듣고 S는 몇 달째 기록이 멈춰 있다는 우울한 사실이 떠올랐다. "근데 너는 수영 안 해?" 여자애가 다시 물었다. "작년인가 개울에서 아이가 빠진 일 이후로 어른들이 개울에 얼씬도 못하게 하잖아. 나는 그래서 여기로 온 건데. 너도 그런 거 아니야?"

 

심장이 쿵, 울린다. "들어와 봐 시원해." 여자애가 해맑게 권한다. S는 잠깐 망설이다가 윗옷과 바지를 벗었다.

집에 가던 길에 햇볕에 목 뒤가 따끔거릴 때면 친구들과 속옷만 입은 채로 개울가로 빠져 놀곤 했었다. 그날도 그랬다.

여자애도 딱히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S는 천천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무릎을 지나 허벅지로 차오르고 다리 사이를 채웠다. 전율이 일었다. 물은 그대로 차올라 가슴 부근까지 올라왔다. 심장이 무거워졌다.


 여기에 내가 포함되어도 되는 걸까, S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이곳에 빠뜨린다 해도 나는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허우적거리는 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자애는 첨벙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돌아가야 해." S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벌써?" 여자애가 되묻는다. 아쉬워하는 표정에 S는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돈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여자애가 다정하게 물어온다. 이상하다. 분명 운동장을 나설 때만 해도 네까짓 게 뭘 알아, 하며 화를 내고 싶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걸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여자애가 사과를 한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S는 모르겠다. 개울에 빠져 죽은 아이가 내 동생이란 것을 기억해 낸 것일까, 아니면 그냥 던지는 위로의 말일까.

 "근데 있잖아. 나는 영원한 건 없다고 생각해. 순간이라는 건 그때뿐이고, 우리는 살아가잖아. 그래서 순간은 바뀔 수 있어, 살아가는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에 따라서 말이야. 이제야 기억해서 미안해. 그때 개울에 빠졌던 아이가 오우시, 네 동생 맞지?"


여자애는 오히려 자기가 울먹거린다. S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잠깐만,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게!" 여자애는 괜히 힘나는 목소리로 말하곤 물 밖으로 나가더니 다이빙대로 올라갔다.

"너무 높아!" S가 소리쳤다. 여자애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완벽하게 어울리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둥둥

몸을 가볍게 흔들거리던 여자애의 몸이 일자로 곧게 뻗어 아래로 떨어졌다.

그림처럼 정체되어 있던 물이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며  S에게 떠밀려왔다. 그 힘이 얼마나 세던지 S는 중심을 잃을뻔했다.

곧 물은 잠잠해졌다.

S는 여자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뭐라 부르고 싶었지만 이름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바보 같다니!

심장이 어지럽게 두근거린다.


그때,

 푸하,

   하는 소리를 내며 완벽한 웃음을 지을 줄 아는 여자아이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完>






*오우시(雄牛) :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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