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낭비

서정아 짧은소설

by 서정아

미진은 무엇 하나 허투루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편과 자신의 수입을 합쳐도 생활은 늘 빠듯했지만 알뜰하게 소비하고 적게나마 여행을 위한 적금도 부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더 절약한 돈은 비밀 통장에 따로 넣어두었다. 가령 물건을 무료 나눔 받거나, 버스 대신 걷기를 선택했을 때. 물론 그렇게 몇 년을 모아도 결코 큰돈이 되지는 않았지만 비밀 통장에 조금씩 늘어나는 숫자를 보고 있으면 미진은 말초적이면서도 애틋한 희열을 느꼈다. 무언가를 아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아끼고 참으면서 조금씩 내 것으로 만드는 이 비밀스런 기쁨을.


오늘 미진은 중고거래 앱을 통해 선빈을 위한 그림책 한 질을 구매하기로 했다. 그녀가 찜해두었던 전집의 본래 가격은 한 질에 30만원이 넘었다. 애초에 새 책을 살 생각은 없었고, 중고마켓에 괜찮은 금액으로 올라올까 싶어 자주 확인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오늘 아침에 그 전집이 3만원에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누가 먼저 채갈까 싶어, 제가 살게요, 하고 선점 댓글을 달아놓고는 그 아래에 다시 비밀 댓글을 썼다. 다소 장황한 감이 있었지만 예의와 부드러움과 유쾌함을 장착한 문장으로, 자신에게 꼭 팔아달라는 부탁과 연락처를 남겼다. 그런 글쓰기라면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애쓴 문장에 대한 보상처럼, 곧 판매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 저녁 6시에 올 수 있으세요? 네고는 안 됩니다. 자신이 썼던 문장에 비하면 너무나도 사무적이고 짧은 연락이어서 괜히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미진은 그런 쓸데없는 감정을 접어두고 다시 정성스럽게 답장을 썼다. 좋은 물건을 저렴하게 판매해 주어서 그저 감사할 뿐이며, 주소를 알려주면 시간 맞춰 가겠노라는 이야기를 여전히 예의바르게, 흔치 않은 수식어와 비유법까지 사용해 적어 보냈다.


미진은 베이비시터 일을 끝낸 후 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으로 서둘러 갔다. 선빈을 남에게 맡겨놓고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의 아기를 돌본다는 사실이 가끔은 속상하기도 했지만, 가정양육수당 10만원을 받고 집에서 선빈을 돌보는 것과,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자신이 일을 하는 것 사이의 경제적 갭이 너무도 컸다. 미진은 선빈을 보자마자 얼른 안아서 아기띠에 둘러멨다. 그렇게 안고 다닐 만한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약속 시간에 맞춰 가려면 어쩔 수 없었다.


미진은 10분 일찍 도착했으나 판매자는 10분 늦게 나타났다. 노끈으로 묶은 책은 동행한 남자가 카트에 넣어 끌고 왔다. 미진은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지나치게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아기띠에 안긴 선빈이 불편했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차 어디에 대셨어요? 차까지 실어드릴게요.” 남자의 말에 미진이 두 손을 저으며, 버스를 타고 왔노라고 대답한 후 약속된 금액을 내밀었다. 그러자 여자가 남자를 한 번 쳐다보더니 썩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요. 그냥 택시비나 하세요. 어차피 우리도 무료 나눔 받았던 거라.” 미진은 손사래를 치며 봉투에 넣어왔던 3만원을 그들에게 건네려고 했지만, 그들은 결국 받지 않고 책 두 묶음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들어가 버렸다. 미진은 그들이 사라져간, 유명 브랜드명이 적힌 신축 아파트 건물과 단지 내의 훌륭한 조경, 그리고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도 무료 나눔을 받는구나. 나보다 훨씬 부자일 텐데 참 검소하네…. 그녀는 여자에게 감사의 마음이 담긴 장문의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미진도 그동안 무료 나눔을 여러 번 받았었다. 언젠가 꽤 괜찮은 아기용품을 무료로 받아서 쓴 일이 있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다시 나눔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그 정도 물건이면 돈을 받고 팔아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녀는, 좋은 마음으로 나눔 받은 것을 돈을 받고 되팔지는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돈 만 원이 아쉬운 형편이라도, 그 정도 윤리 의식은 있다니까.” 그러자 남편이 갑자기 옛날이야기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아나바다 장터를 열자고 했다는 것이다. 남편은 자신이 무척 아끼던, 하지만 더 이상 가지고 놀지는 않는 장난감을 가져와 100원에 팔았다. 그런데 구매해간 아이가 다른 친구에게 그것을 500원에 되판 것이다. 그는 속상한 마음에 선생님에게 하소연을 했는데, 선생님은 그를 위로해주지 않고 장난감 가격을 5배로 올려 되판 그 친구를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이다.”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고, 남편은 별다른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진은 자신이 쓴 장문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나눔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담겨있으며, 그동안의 독서력이 녹아있는 문학적인 문장이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그녀는 바닥에 놓인 두 묶음의 책을 내려다보았다. 칭얼거리던 선빈은 어느새 지쳐 잠들었는지 아기띠 안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택시를 타지 않고 3만원을 비밀 통장에 저금할 생각이었는데, 잠든 선빈을 안은 채 두 손에 책 묶음을 들고 만원버스를 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피로가 지층처럼 겹겹이 쌓였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의 미로 같은 길 위에서 미진은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절약과 저축, 미래에 대한 소소한 희망, 그리고 타인의 선의에 대한 감사와 믿음, 그런 진심어린 마음들이 어쩌면 모두 낭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것도 낭비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애쓰며 살아왔는데 말이다. 미진은 여자에게 보내려던 장문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삭제해버렸다. 진심과 아름다움은 이런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2024년 12월 요산기념사업회 소식지 창간호에 수록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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