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아 짧은 소설
유나는 가끔 자신이 아이 엄마라는 사실을 잊었다. 한 남자의 아내라는 사실도, 누군가의 며느리라는 사실도 잊었다. 그런 순간에 그녀는 독자적으로 존재했으며, 이미 맺어진 관계들로 인해 마음을 속박당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가족에게 소홀했다는 뜻은 아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유나는 다정한 엄마였고 참을성 있는 아내였으며 살뜰한 며느리였다. 그러면 된 거 아닐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루 24시간 내내 가족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 필요는 없잖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그들에게 충실하고 혼자 있을 때는 스스로에게 충실한 마음으로 지낸다. 그것이 관계에 대한 그녀의 태도였다. 비록 스스로에게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았으며 그마저도 금방 깨져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이 시간에 혼자 책을 읽는 여유라니, 대단해. 역시 한유나.
오래전 재경은 술에 취한 채로 집에 들어와 유나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삼십 분 넘게 동화책을 읽어주어도 율은 언제나 자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버텼고, 그런 아이를 어르고 달래가며 간신히 재우느라 그녀는 녹초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겨우 도달한 고요를 잠으로 묻어버리기가 아까웠기 때문에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소파에 기대어 책장을 넘기고 있던 참이었다. 유나는 고기와 술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채로 들어와 속 편하게 그런 말을 하는 재경에게 조금 심술이 났다. 애가 그냥 자는 줄 알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고서 얼른 씻고 자라고만 말했다. 그녀는 똥이 의인화되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밤마다 몇 번이고 소리내어 읽어야 했다. 파스텔톤의 나지막한 책장에는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동화책들이 몇 종류 있었는데, 새로운 동화책을 사주어도 율은 매번 그 낡은 책들을 읽어달라고 졸랐다. 물론 그런 시간은 유나에게도 행복감을 주었다. 그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힌 채 두 팔로 감싸안고 언제나 자신보다 살짝 높은 율의 체온을 감지하면서, 어린애의 몸에서만 풍겨오는 달달하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면서, 특정 장면마다 까르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율을 보는 일은 그녀를 감정적으로 충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이와의 깊은 유대를 통한 감정적인 만족감이 육체적 피로를 상쇄해주는 것은 아니었으며, 홀로 어디론가 숨어들고 싶은 근원적 욕구를 없애주는 것도 아니었다. 율과 온종일 붙어있으면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쉬운 말로 대화를 하고 유아의 수준에 적합한 동화책들만 읽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언어 능력이 퇴화하고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율이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유나가 오롯이 혼자 집에서 아이를 케어하던 몇 년 동안 그녀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성인의 언어였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재경에게 해본 적은 없었다. 재경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고 그것은 유나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경은 분명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힘들면 괜히 고집 피우지 말고 지금이라도 어린이집 보내. 유나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버린 재경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재경은 그대로 빠르게 잠들었고 그날 유나는 소파에서 이불도 없이 자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버렸다.
어쨌거나 그런 시기도 모두 지나간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고 실제로 지나갔다. 손꼽아보면 그리 오랜 세월은 아닌데 마치 전생처럼 아득했다. 그 사이 아이는 고열로 경기를 일으켜 응급실에 여러 번 갔었고, 공놀이를 하다가 넘어져 쇄골뼈가 한 번 부러졌으며, 공원에서 실종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유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는데 재경은 언제나 태평하게 굴었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그의 말대로 율의 체온은 어떤 후유증도 남기지 않은 채 정상을 되찾았고 부러졌던 쇄골도 잘 붙었다. 공원에서는 관리사무소를 통해 여러 번 방송을 한 끝에 한 시간 만에 아이를 찾았다. 중절모를 쓴 노신사가 율을 데리고 왔는데 공원 화장실 뒤편의 구석진 벤치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유나는 울면서 아이를 껴안았다.
율아, 그런 데서 혼자 잠들면 어떡해.
나 안 잤는데.
그럼 뭐 했어?
몰라, 생각 안 나.
유나는 그 모든 상황이 이상하고 의심스럽고 아이를 데려다준 노인에게까지 괜히 신경이 곤두섰지만 어찌 되었든 아이를 멀쩡하게 되찾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재경은 극구 사양하는 노인에게 담뱃값이라도 하시라면서 억지로 몇 만원을 쥐어주고 유나를 향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 아무 일 없다니까. 요즘 세상이 무섭니 어쩌니 해도 좋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아이가 한 시간 동안 실종됐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도 못 하는데 어떻게 웃음이 나오나 싶어 그때는 진심으로 재경이 미웠지만, 돌이켜보면 그래도 그의 낙천적 태도 덕분에 모두가 금방 안정을 찾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저런 일들이 때때로 그들을 휩쓸고 가긴 했어도 그들은 무난하게 잘 지내왔고, 유나는 아이가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시기에 좋은 엄마의 역할을 괜찮게 해냈다고 자부했다. 이제 율은 학교에 다니고 많은 것을 스스로 하게 되었으며 그만큼 유나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자신이 차려준 음식들을 골고루 다 먹고 단정하게 숟가락을 내려놓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율아, 이번 여름방학에도 작년에 갔던 거기 또 갈까? 물 위에서 타는 놀이기구들 다 재밌었지?
싫은데. 무서워.
무섭다고? 작년에 잘 놀았잖아.
뜨거웠던 여름의 한낮. 강 위에 띄워놓은 에어 슬라이드와 각종 수상 놀이기구들을 타면서 신이 나서 함박웃음을 짓던 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유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 그때 죽을 뻔했잖아. 엄만 기억 안 나? 동그란 우주선 같은 거 타고 놀다가 물에 빠졌잖아.
유나도 물론 그 일을 기억했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곳은 원래 물에 빠졌다 올라왔다 하며 노는 곳이었다. 유나는 아이를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고, 아이가 우주선 모양의 대형 튜브 아래로 빠진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들어올렸다. 율은 당연히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으므로 바로 물 위로 올라왔다.
엄마, 근데 그때 왜 나 보면서 웃고 있었어? 난 무서웠는데.
엄마가 웃었다고?
응, 웃었어. 그래서 슬펐어.
그날의 슬픔은 하나도 간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천진한 얼굴로 그런 말을 하고 제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유나는 마음 한편이 서늘해졌다. 율은 그동안 내가 알아채지 못한 일들로 내면을 꾹꾹 채우며 자라고 있었던 걸까. 열 경기를 일으킬 때 아이가 내뱉던 알 수 없는 말들, 잘 붙었다지만 그녀가 눈으로 확인해 볼 수 없는 아이의 쇄골, 공원에서 실종되었던 한 시간, 그리고 시선을 채 멈추기도 전에 이미 그녀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일들. 유나는 아이가 깨끗이 비운 그릇들을 치우다가 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가족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모두가 환하게 웃고 있는 좋은 사진이었지만, 그 사진 속에는 많은 것들이 빠져 있었다.
* 2024년 <함께가는 예술인>에 수록한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