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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FRAU Jun 14. 2022

자전거 택시

스위스 일기

비가 왔다. 비가 너무 왔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폭우가 내렸다. 비 소식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밖에 나가기 두려울 정도로, 우산만으로 될까 할 정도로 많이 올 지는 몰랐는데 머리를 긁적였다. 곧 나가야 하는데 좀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내고 조금이라도 그치길 기다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더니 마치 폭포처럼 쏟아붓던 빗줄기는 자세히 보아야 보일 만큼 가는 빗줄기로 바뀌었다. 

지금이다. 


혹시 몰라 튼튼한 우산으로 챙겨 들고 기차를 타러 나갔다. 방금 전까지 폭포수가 내린 게 분명했다. 집을 나서자마자 계곡에서나 느낄 법한 그 청량함? 그 시원함? 흙과 물이 섞인 그 계곡에서의 물놀이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기차역까지 가는 길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반대편 기차 플랫폼에 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갔다. 그런데 지하도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고 어떤 분은 나에게 무언의 고갯짓을 보이셨다. 곧이어 다른 분이 나에게 신발을 벗는 게 좋겠다고, 건너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네?



통행금지

무슨 일 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지하도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통행금지 표지판을 설치하려는 건지 아니면 정리하려는 건지 작업복을 입으신 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이어 그분들의 발이 물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하도가 정말 잠겼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건너가야 한다는 생각이 컸던 걸까. 당황해하고 웃으며 젖은 옷을 털고,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멍하니 내가 가야 할 길을 쳐다봤다. 작업 중이시던 분이 지나가도 되는데 지나가려면 신발을 벗는 게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감사하다고 웃었는데 노래 가사처럼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간 시선의 끝에 있는 흰 운동화가 야속했다. 



자전거 택시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신발을 벗을 준비를 하는데 어떤 여자분이 반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 쪽으로 도착하셨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작업하시는 분들과 이런저런 농담을 주고받으시는 거 같았는데 내 머릿속엔 온통 흰 운동화와 흰 양말이 야속하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건너가야 하나요?"

"네? 네."

"타요! 내가 택시 해 줄게요."

"네?!"


내가 잘못 들었나, 내가 이해를 못 했나 하는 생각에 다시 한번 물었는데 괜찮다고, 꽉 잡으라고 나를 이끌어 주셨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만 되풀이하면서 처음 만난 그분의 자전거에 몸을 싣고 흰 운동화와 흰 양말에 물 한 방울 튀기지 않은 채 물을 건넜다. 뽀송하게 도착했다. 


"잘 가요! 좋은 하루 보내요"

"정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선물

"나 방금 어마어마한 생일 선물을 받은 거 같아! 이게 무슨 일이야."


오늘이 내 생일이라 남편과 저녁을 먹으러 나가던 길이었다. 생일이라고 집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비가 왔고,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보니 한식이 더 그리워서 루체른 시내 한식당에 가자고 약속을 바꿨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차라리 집 근처에서 먹을 걸 하는 생각과 한식인데 그냥 집에서 만들어 먹자 할 걸 하는 생각과 또 동시에 아 그래도 오늘 내 생일인데 하는 괜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집을 나섰었다. 나 때문에 비도 오는데 퇴근하고 번거롭게 멀리서 만나자고 했나 하는 미안한 마음과 심지어 좀 늦을 것 같다는 미안한 문자를 보내고 도착한 게 물에 잠긴 지하도였다. 그런데 뽀송하게 건너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그것도 모르는 분의 자전거에 몸을 싣고...!


기차에서 만난 남편에게 무슨 무용담(?)을 털어놓는 것처럼 신나서 이야기했다. 문장의 끝에는 "진짜 너무 감사하지."라는 말을 매번 붙이면서. 


용기를 선물 받은 거 같았다 

먼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용기

내 일이 아니기에 모른 척할 수도 있지만

또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무안함이 앞서서 그냥 고개를 돌릴 수도 있지만 

그 내민 손이 오래도록 기억될 선물과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마음은 오래간다



스위스 일기(2022.05)

표지 사진 : Photo by guy steven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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