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의 고향'에서 '구미호뎐'까지
어느 산골 한적한 집. 흐릿한 호롱불 아래, 남편과 아내의 평범한 저녁의 일상이 펼쳐진다. 행복이 충만한 얼굴의 아내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짚을 꼬면서 그런 예쁘고 착한 아내를 얻은 자신이 복에 겹다는 표정으로 그윽하게 바라본다. 아마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만 같은 행복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득 남편은 불현듯 아주 옛날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만났던 구미호 이야기를 꺼낸다. 해서는 안 되는 그 얘기를 하는 순간, 카메라는 살짝 남편 뒤쪽으로 가려졌던 아내를 비춘다. 거기에는 그 행복에 겨운 얼굴의 아내는 사라지고, 분노와 한이 서린 구미호가 앉아있다...
아마도 어린 시절 한 번쯤은 보았을 장면, 바로 시간이 흘러도 매년 반복되어 만들어지는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를 대표하는 장면이다. 너무 무서워 한여름인데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실 "지나갔어?"하고 물어보던 그 귀신, 그 공포의 기억은 당대를 살았던 분들이라면 누구나 추억의 한 자락으로 갖고 있을 것이다. 자애로운 얼굴에서 기묘한 분장의 괴물로 순간 변신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떨게 만들었던 그 기억. 하지만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렇게 변신하는 구미호를 보면서 공포를 느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구미호라는 캐릭터가 굳건히 살아서 지금도 재주를 넘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무섭기보다는 어딘지 정이 가는 이 요물에 여전히 빠져드는 이유는?
77년부터 무려 12년 간 매주 570여 편을 방영했고, 96년부터 99년까지 70여 편이 방영되었으며 이제 2000년대에도 여름이면 어김없이 돌아와 다시 방영되곤 했던 '전설의 고향'은 세대를 뛰어넘는 고전 중의 고전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전설의 고향'을 스테디셀러로 만들었을까. 우선 ‘전설의 고향’이라는 형식이 가진 무궁무진한 이야기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는 각 지방마다 하나씩은 꼭 있게 마련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傳說)를 극화했다. 거기에는 특이한 자연물에 대한 유래나 인물에 얽힌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이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데다가, 지방의 연원이나 특색을 담고 있고, 또한 적정한 교훈도 갖고 있기 때문에 드라마 콘텐츠로서 그만일 수밖에 없다.
이런 고전이 시대를 뛰어넘어 힘을 발휘하는 건 그 안에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는 본연적인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신화나 설화는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예 콘텐츠에 있어서 이런 원형적인 스토리들을 발굴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른바 '문화 원형'이라는 개념이 여기서는 등장한다. '문화 원형'을 끌어와 성공한 대표작으로 '해리포터'가 손꼽힌다. 이 작품은 유럽 북구의 원형적인 신화들을 끌어와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또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원령공주' 같은 작품은 일본의 설화와 신화가 그 원형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특수한 지역의 스토리에서 보편성을 끄집어낸다면 세계적인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문화 원형의 관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아무래도 할리우드가 될 것이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국적과 상관없이 전 세계에 숨겨진 문화 원형 콘텐츠들을 발굴하는데 투자를 아끼지 않았 다. 즉 '뮬란'이나 '쿵푸팬더' 같은 콘텐츠들은 중국의 문화 원형을 끌어와 세계화한 작품들이다. 즉 문화 원형은 말 그대로 콘텐츠 산업에 있어서는 발굴해 내야 할 원자재 같은 것이다. 원자재가 다른 나라에서 온 것이라도, 그것으로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면 바로 그곳이 그 콘텐츠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문화 원형 발굴을 둘러싼 콘텐츠 전쟁은 말 그대로 국경 없는 전쟁터나 다름없게 되었다. 가장 쉬운 사례로 '신데렐라' 스토리는 우리네 드라마 속에 늘 존재하지만, 특정한 우리 사회의 맥락과 다시 만나서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이런 드라마 콘텐츠들은 이른바 한류라 불리며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동남아까지 퍼져나간다. 이런 문화 원형을 두고 벌어지는 세계의 콘텐츠 전쟁을 염두에 둔다면, 왜 '전설의 고향' 같은 스테디셀러 드라마가 중요한 지 이해가 갈 것이다. '전설의 고향'은 바로 우리네 문화 원형으로서의 전설과 설화 이야기를 무궁무진하게 갖고 있다.
하지만 양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질적으로 변환시키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런 콘텐츠가 되지 못한다. 즉 고전을 현재로 끌어올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적 시각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재해석의 문제에 있어서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만큼 어떤 성패의 단서를 제공하는 콘텐츠도 없을 것이다. 초창기 구미호가 열렬한 환호를 받았던 것은 당대 여성들의 억압과 해방이 그 특별한 공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미호의 캐릭터는 무엇보다 그 변신능력과 사람의 간을 빼먹는 두려움으로 구성된다. 변신하기 위해 재주를 폴짝폴짝 뛰어넘기만 하면 되던 구미호가 왜 사람이 되려 하며, 또 한 사람의 아내가 되려 하는지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전통적인 사회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따라서 한 남편의 아내로서 사람행세를 하기 위해 긴긴 세월을 참으며 살아가는 구미호의 모습은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억눌려온 우리네 며느리들을 대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 아내로서 사람으로서 살려했던 구미호가 결국은 그것을 포기하고(이것은 남편이 저버린 약속 때문이다), 다시 여우로 떠나간다는 설정이다. 이 부분에서 당대의 시집살이하던 며느리들은 공포라는 장르 속에서나마 억압의 탈출을 경험한다. 떠나간 구미호를 뒤늦게 그리워하며 아쉬워하는 남편의 뒤늦은 후회는 ‘구미호’가 인간이 되기 위해(며느리가 사람대접받기 위해) 겪은 천 년 동안의 힘겨운 시집살이에 대한 소극적인 위안이 된다. 자유로운 한 인간이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아내이자 며느리라는 변신을 강요받고, 또 그 아내이자 며느리가 다시 자유로운 인간으로 변신하고자 하는 이 욕구의 반복은 ‘구미호’가 가진 핵심적인 재미를 구성한다.
하지만 지금은 가부장적 사회의 단면이 고부갈등으로 표출되던 1970년대가 아니다. 그러니 '구미호'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시대와 상관없이 어느 사회에나 억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구미호'의 콘텐츠적인 원형은 사회적 억압과 그 억압을 벗어나려는 변신욕구를 공포라는 장르 속에서 그려내는 것이다. 따라서 억압이 존재한다면 이 콘텐츠는 어느 시대에나 변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2010년도에 재해석된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그 억압은 인간의 욕망이다.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구미호의 간을 빼먹으려는 인간의 등장은 21세기 가장 무섭고 억압적인 존재가 더 이상 귀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의 간을 빼먹던 구미호가 오히려 자신의 간을 빼먹으려는 인간을 피해 달아나는 이야기. 이 변주된 구미호 이야기에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구미호가 등장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 속에 깔린 계급에 대한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이 이야기 속에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호시탐탐 구미호의 간을 노리는 양반과 그 집에 기거하는 하인들은 명확히 대비되며, 나이 어린 그 양반의 자제들은 저마다 하인들이나, 구미호 모녀에게 패악스런 짓을 태연하게 저지른다. 심지어 우물 속에 구미호의 딸을 집어던지는 장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못하며 오히려 통쾌해하는 양반의 딸의 모습은 누가 괴물이고 누가 인간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한편 이 양반은 마치 구미호를 사모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는 알 수 없게 그려진다. 양반과 구미호는 이 과정에서 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서로 욕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딸을 살리기 위해 대립하는 존재. 이 애증이 교차하는 대결구도는 이 새롭게 해석된 '구미호 여우누이뎐'이 현대인들과 다시 만나는 지점이다. 구미호의 이 시선은 현대의 서민들이 상류층을 바라보는 '선망과 증오'가 뒤섞인 시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물론 그런 시선조차도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조장된 것이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나 “내 다리 내놔”란 유행어로 잘 알려진 ‘덕대골’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이 드라마의 기본 힘이 공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볼 수 있는 콘텐츠라는 점이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끔찍한 피와 살점이 튀는 요즘의 공포물들과 비교해 보면 ‘전설의 고향’의 영상은 그저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뇌리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공포감은 직접적인 장면의 잔혹함보다는 간접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의 무서움에서 비롯된다. 게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한 속에는 저마다 복수의 이유들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결국 이 스토리들이 권선징악의 보편타당한 교훈들을 갖게 만든다. 따라서 마지막에 가서 “이 이야기는 ○○○에서 전해져 오는 것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라는 정리 멘트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즉 '전설의 고향'이라는 콘텐츠는 아주 지역적이고 토속적이며 구체적이면서도 그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문화 원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대단히 매력적인 콘텐츠의 특징이다. 글로컬 한 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최근에 등장한 '구미호뎐'은 '전설의 고향'이 발굴해 낸 문화원형으로서의 구미호나 이무기, 어둑시니, 우렁각시 같은 존재들이 마치 마블의 히어로들처럼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었다. 여기서 구미호는 더 이상 여성이 아니다. 이연(이동욱)이라는 남자 구미호는 스타일리시한 현재의 슈트를 입고 우산을 들고 도시의 거리를 활보한다. 그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을 해코지하는 요괴들과 싸우는 것이다. 토속적인 캐릭터를 가져왔지만 그 해석은 오히려 글로벌에 닿아있다. 그러다 보니 저 본래의 구미호가 갖고 있던 그 억압과의 대결구도 같은 것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장르 또한 더 이상 공포가 아닌 액션 히어로물에 가깝다. 스핀오프로 제작된 '구미호뎐 1938'은 더더욱 오락물적인 성격을 가미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구미호는 물론이고 수리부엉이 홍주, 백두산 호랑이 무영 같은 토종요괴들이, 일본의 텐구나 그의 명령을 따르는 시니가미 같은 일본 요괴들과 싸우는 이야기다. 구미호 캐릭터의 '한일전'이랄까. 훨씬 발랄하고 세련된 구미호지만 내게는 어딘지 조금은 구닥다리처럼 보이지만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에서 더 한국적인 맛이 느껴진다.
'구미호'로 대변되는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을 보면 무섭기보다는 정이 간다. 그들은 모두 시대에 의해 억압되고 핍박받는 존재들이며, 그 한에 의해 탄생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인간다운 대우를 받고 싶다'는 그 소박한 소망을 가진 그 슬픈 존재들은 당대가 갖고 있는 차별과 억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구미호' 같은 우리네 한을 가진 귀신들은 계속해서 리메이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 역시 저 조선시대와 다를 바 없는 차별은 어디서나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억압들을 구미호라는 불가사의한 존재와 연결 짓는다면 여러 버전의 구미호 콘텐츠들이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건 우리만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어느 곳이든 어떤 사회든 차별적 시선은 여전히 존재할 테니 말이다. 구미호라는 문화원형이 가진 잠재력은 이처럼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한국은 물론이고 글로벌까지 나갈 수 있을 만큼 크고 깊다. 그래서 구미호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재주를 넘는다. 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특별한 변신을 꿈꾸며.
2024.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