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하다 보니 알게 됐다. 나는 상체에 비해서 하체 힘이 좋다. 걸어 다니는 것도 좋아한다. 이 조그마한 동네를 걷거나 버스 타고 다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고맙게도 도서관은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다. 수영장은 걷고 버스를 타면 30분 정도가 걸린다. 집에서 동쪽에 있는 언덕을 올라가면 맥도날드와 올리브영이 있는 시내가 나온다. 가끔 버스를 놓치거나 지각을 할 때면 택시를 타는 옵션이 있는 30대! 걱정이 없었다. 길에 사람도 별로 없겠다 르세라핌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나무와 꽃들을 찍으며 걸어다니는 건 일상의 큰 즐거움이었다.
왜 우리집은 분지 같은 곳에 있을까? 도서관도 시내도 수영장도 모두 오르막을 올라가야 나왔다. 4월에 접어들며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숏패딩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람은 춥지만 오르막을 걸어 올라가느라 심박수가 여지없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버스를 놓쳐 수영 강습에 늦을 위기인데 택시가 10분째 안잡히기도 했다. 부모님이 외출할 때마다 차를 얻어 탈 기회를 보는 것 등 자잘한 스트레스가 쌓여 가기 시작했다. 어느 주말, 엄마 외출 시간에 맞춰 수영장에 좀 데려다 달라고 했다. 신호 대기 중 엄마가 길가에 세워진 베이지색 모닝을 보며 나도 저런 차 하나 끌고 다니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내가 무슨 돈으로 차를 사서, 운전을 하고 다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이내 그래야겠다고 깊게 수긍했다. 그래, 차를 사야겠다.
해가 뜰 쯤에 새벽 수영 강습을 듣고 나와 뿌듯함에 젖어 보기, 먼 동네 놀러가기, 날씨에 상관없이 도서관 가고 싶을 때 가기.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내 마음 속 욕구들이 그려내는 그림에 나는 목표의식이 확실해졌다. 그 뒤로는 막힘없이 일이 진행되었다. 진행 순서는 좀 비범하다. 보통은 차를 사고, 연수를 받아 바로 운전을 시작하던데 나는 차를 사기 전에 운전 연수를 받았다. 차에 타기 전에 보닛 열어 보기, 주유구 확인, 트렁크 여는 법까지 친절히 알려주신 선생님과 깔깔깔 웃으며 6시간 연수를 끝냈다. 차를 사기도 전에 거금을 냈지만, 후회는 없다! 그 다음은 가장 큰 고비였던 차를 사는 단계였다.
연년생인 여동생은 나보다 똑부러지다. 운전, 차 구입, 결혼, 출산까지 쭉쭉. 내 인생 선배 길을 걷고 있다. "언니, 차 사기 전에 돈 들어갈 곳들 다 조사해 놓고 쓸 수 있는 돈 생각해서 예산을 좀 짜 봐." 예산이라니, 너 좀 멋있는 충고를 해 주는구나? 현실적인 동생의 충고를 뒤로 하고 난 분수에 맞지 않게 현대나 기아에서 나온 준중형 차를 사고자 했다. 하지만 지역 신문, 중고차 중개 앱, 당근마켓을 몇 주째 보다가 내가 원하는 컨디션의 차는 상상 속에나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괜찮은 가격이다 싶으면 옵션이 부실하거나 주행거리가 15만키로 이상이거나 보험사고가 많이 났거나 전기차(전기차는 사고 싶지 않았다)였다. 준중형의 손을 놓기 직전, 새빨간 아반떼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