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화려한 데뷔가 또 있을까요. 검사 시절부터 ‘윤석열 맨’으로 불린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그는 최연소 검사장을 거쳐 윤석열 정부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됩니다. 역대 최연소 법무부 장관 타이틀은 덤. 윤 대통령이 한 대표만큼 신뢰했던 측근은 찾기 어려울 겁니다. YS 차남 김현철 씨 정도가 누렸던 ‘소통령’ 위세도 한 대표 몫이었죠.
지난해 12월 26일엔 법무부 장관에서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가는 초고속 직행열차를 탑니다. ‘정치 초짜’일 뿐인데도 순식간에 차기 대선 주자 반열에 올랐습니다. 대단한 기세였죠. 시련도 있었습니다. 지난 4·10총선 참패 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서 물러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석 달 뒤인 7월 23일 전당대회를 거쳐 여당 대표로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일까요. 한 대표는 비대위원장 때부터 ‘김건희 여사 리스크’에 대한 시각 차이로 윤 대통령과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12·3 비상계엄’ 때 체포 대상 정치인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죠. 결정적으로 이번 윤 대통령 탄핵에 공개 찬성하면서 당내 ‘배신자’ 낙인이 찍혔습니다.
지난 14일 국회의 탄핵안 가결 이후 국민의힘 비공개 의원총회장. 친윤(친윤석열)계를 중심으로 한 의원들은 ‘배신자 한동훈’에게 가차 없는 ‘처단’을 실행합니다. 책상을 내리치며 “당 대표 오라고 해” “대표가 왜 당론을 안 따르냐”고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다음 날에도 계속됐습니다. “한동훈의 등장은 불행의 시작” “국민의힘은 배신자가 속출하는 자중지란” “배신자 한동훈은 자격이 없다” “범죄자에게 희열을 안긴 이기주의자” “찌질하게 굴지 말고 즉각 사퇴” “계속 버티면 추함만 더할 뿐” 등 십자포화가 이어졌습니다.
버티던 한 대표는 이내 ‘부러졌습니다’. 윤 대통령의 오랜 동지에서 배신자로 전락한 한 대표는 결국 16일 “당 대표직을 내려놓는다”고 알렸습니다. 탄핵에 찬성한 것에는 “여전히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불과 5개월, 정확히 146일 만에 국민의힘 한동훈 체제는 붕괴했습니다.
사퇴 기자회견 중 한 대표의 발언 일부를 옮겨 봅니다. ‘배신자’가 말하는 ‘보수의 정신’입니다. “국민의힘은 지난 3일 밤 당 대표와 의원들이 국민과 함께 앞장서서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의 불법 계엄을 막아냈다. 그것이 진짜 보수의 정신이다. 우리가 부정선거 음모론자, 극단적 유튜버 같은 자들에게 동조하거나 그들이 상업적으로 생산하는 공포에 잠식당한다면 보수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국민의힘에선 위기 때면 배신자가 곧잘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등장’한 게 맞을까요. 아니면 배신자를 ‘만들었다’ 또는 ‘내세웠다’는 말이 더 타당할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 최측근이었다가 한순간에 눈 밖에 난 유승민 전 의원이 ‘원조 배신자’입니다. 박 전 대통령이 유 전 의원을 겨냥해 “배신의 정치”라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죠. 유 전 의원은 2017년 박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찬성하면서 확실한 배신자 딱지를 달았습니다.
그는 12·3 비상계엄, 윤 대통령 탄핵, 한 대표 사퇴 등 일련의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마침, 한 대표가 사퇴한 이날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심경을 밝혔네요. 그는 우선 한 대표를 배신자라고 부르는 당내 여론을 맹비판했습니다.
“우리가 내란, 쿠데타, 반헌법적 계엄에 찬성하는 사람들인가. 그런 점에서 배신자라고 하는 이 프레임은 말도 안 된다. 우리 스스로를 천박한 정치 집단으로 만드는 아주 나쁜 프레임이다. 정면으로 깨부숴야 한다.” 유 전 의원은 ‘국민의힘이 조폭이냐’는 거친 표현도 썼습니다. 그는 “한 대표가 탄핵에 ‘찬성하자’, ‘할 수밖에 없다’고 얘기한 걸 가지고 배신자라니, 누가 누구를 배신했다는 거냐”며 “그렇게 중한 죄를 저지른 대통령을 끝까지 감싸다니, 우리가 무슨 조폭이냐. 그걸 어떻게 감싸나. 그걸로 배신이라고 하는 프레임을 덮어씌우는 건 8년 전에도, 지금도 잘못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유 전 의원이 8년 전 부산의 한 대학에서 강연할 때 현장 취재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그가 역설한 ‘보수의 가치’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낡은 보수로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고통받는 국민에 대한 배려가 없는 차가운 모습에서, 이념과 정책 지향점을 중산층·서민에 맞추는 따뜻하고 정의로운 보수로 바뀌어야 한다. 헌법에 나와 있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야 한다.”
‘두 배신자’가 말하는 보수의 정신·가치는 정의로움, 따뜻함, 국민에 대한 배려, 헌법 수호 등으로 정리됩니다. 특별한 하자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 진짜 배신자는 누구인가요. 정치인이 배신하지 말아야 할 대상은 국민뿐이지 않을까요. 생각이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