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점부터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개천에서 용 안 난다… 최고 스펙은 부모' '개천에서 용 안 난다… 금융위기 후 빈곤 탈출률 ○%'. 신문에 이런 부류의 제목이 유행처럼 달리기 시작했죠.
'강남에만 용 난다' '유치원생도 의대 준비… 개천에서 용 안 납니다'. 이런 제목도 보이네요. 경제·사회적 계층의 대물림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의미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 되기 어렵고, 못 배운 부모 밑에 자라 일류 대학 가기 쉽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전엔 드물지 않게 개천에서 용 나고, 개똥밭에 인물 났습니다. 학원 다니거나 과외받을 형편이 안 되는 친구도 서울대 의대·법대에 갔습니다. 끼니를 못 챙기던 빈농의 자녀가 혼자 힘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재산을 모아 기업 회장이 된 사례도 많았죠. 돈이 없어 대학에 못 갔지만,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판사 국회의원 장관을 거쳐 대통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누구든 '희망'을 얘기할 수 있는 시절이었죠.
하지만 이제 꿈이 아닌 현실에서 '개천 용'을 볼 확률은 희박해진 걸까요. 18일 통계청이 '2017~2022년 소득 이동 통계 개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2021년 → 2022년’ 기준 우리 국민을 소득에 따라 나누면, 5분위(상위 20%) 부자는 10명 중 9명이 해가 바뀌어도 계층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가난한 1분위(하위 20%)는 10명 중 7명이 계층 상승에 실패했습니다.
상향이든 하향이든 소득 분위가 바뀐 국민은 전체의 34.9%인데요, 가장 '잘살고, 못사는' 계층일수록 이동이 훨씬 적었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되려면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지만, 한 번 진입하면 웬만해선 계층을 이탈하지 않습니다. 돈이 돈을 법니다. 저소득 계층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부자와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집니다.
금수저는 금수저, 흙수저는 흙수저로 평생을 살 가능성이 큽니다. 통계가 증명합니다. 대한민국 계급 사회의 단면입니다.
오죽하면 인위적으로라도 개천에서 용 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최근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부모 경제력과 거주 지역이 서울대 진학에 미치는 영향을 작심하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상위권 대학 입학 정원을 지역별 학령인구 비율에 맞춰 조정할 것을 제안했죠. 이른바 '지역별 비례선발제'입니다. 국민의힘 박수영(부산 남구) 의원은 이 방안을 두고 이달 초 국회에서 토론회도 열었습니다.
흙수저 쥐고 태어나도 이 악물고 노력하면 금수저 들고 밥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 희망이 없는 사회는 불행하고 어둡습니다. 점점 굳어지는 계층 대물림을 끊어내야겠습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니까요. 다음 세대가 딛고 올라갈 '계층 이동 사다리'를 촘촘하게 놓는 일, 미적거릴 시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