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순간, 하루는 특별해진다.
아침 6시가 되면 탁상 위에 밤새 충전되어 배가 터질 듯한 핸드폰도 그만 눈떠라며 알람 소리를 우렁차게 토해낸다. 그리고 아이들 등교를 마치고 나면, 7시. 나의 하루는 상가 카페의 커피 향과 함께 시작된다. 카페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서사가 가득하다. 젖은 머리로 아이를 챙겨온 엄마, 화장을 완벽히 마치고 자신감을 드러내는 엄마, 아기에게 시달린 티가 역력한 엄마, 동료와 웃으며 출근 전 시간을 보내는 아빠, 커피와 담배로 하루를 열고 싶은 아빠, 주식 앱을 내려다보며 한숨만 내쉬는 아빠…..모두가 내 눈에는 확연히 보인다. 그렇다. 나는 관찰자다. 나의 시간은 타인에게로 흘러간다. 이렇게 아침 7시가 되면, 나는 이 시간부터 비로소 작가의 하루가 시작된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나는 관찰자, 구경꾼으로서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기에 작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눈을 타인에게 억지로 두지 않아도 그들의 몸짓, 눈빛, 어색해하는 웃음, 호탕한 웃음, 석연치 않아 하는 표정, 억울해하는 그 허탈한 입 모양, 얼굴 빛깔 모두가 나의 시선을 잡는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제법 근사한 철학자가, 심리학자가, 소설가가 되어 있다. 내게 관심을 받은 그들은 어쩌면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밤샘 육아를 하다 카페에 나왔던 십 년 전의 나, 등교 전쟁에 지쳐 얼굴빛이 바랬던 그때의 나, 주식 때문에 상심한 남편을 바라보던 나, 친구와의 대화에 마음이 무거웠던 오늘의 나. 그들이 모여 결국 나를 이룬다. 그렇게 쌓인 이야기는 노트북 속에서 여전히 다채롭게 숨 쉬고 있다.
게다가 내가 글을 쓰는 두 번째 의미는 과거를 향한 동경과 기록에서 시작된다. 나는 과거를 좋아한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을 어리석고 딱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내 흔적을 고스란히 다 남기고 싶다. 무슨 책을 읽었고, 무슨 생각으로 살았는지, 내 감정은 어떤 흐름으로 이어졌는지 아주 자세하게 써놓았다. 그리고 그 모든 지나온 시간의 메모를 나는 소중하게 여겼으며, 이것은 브런치 스토리 글쓰기 작업으로 이어져 나갔다.
과거에 대한 미련이 많아서라기보다는, 과거 찰나의 감정과 의미를 부여했던 행동들, 자신과 혹은 타인과의 소통의 과정을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고, 최적의 단어를 부여해 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저 의미 없어 보이는 소박한 흰 쌀죽 같은 내 하루가 단호박 죽처럼 달콤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생긴다. 과거의 시간, 감정들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내 지난 하루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고, 그것은 브런치 스토리로서 작가가 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물론 지금도 나는 다이어리를 쓴다. 이제 그 다이어리는 나의 브런치 글의 개요로서 기억의 아카이브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작가로서 모든 관찰을 기록하고, 또한 내 모든 역사를 써내려 감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들도 나와 같은 인생의 관찰자로서, 때로는 기록자로서 하루를 잘 보내기를 바란다.
시간이 지나 감실감실한 주름살이 가득해도 나는 카페에서, 공원에서, 문화센터에서 시선을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머물게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찰 속에서 나의 모습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눈이 제 기능을 하는 한, 기록을 이어갈 것이다. 오늘 무엇을 보았고, 느꼈는지, 그 살핌들 속에서 나의 지난 모습이 어떻게 투영되는지 글을 통해 물어볼지도 모른다. 수많은 글감들이 자신을 뽑아달라고 농성 중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논리적인 전개로 독자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렇게 전달된 글로 인해 내 글을 읽는 이들이 그들의 과거 모든 순간의 찰나, 희열, 무료함, 분노의 그 모든 감정들을 글로서 다시 직면하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글 속의 주인공, 혹은 저자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함과 동시에 마음속 깊이 관찰되지 않았던, 혹은 의도적으로 숨겨둔 모든 속앓이들을 직면하여 세상밖으로 내보내길 바란다. 저자 역시 그런 의미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관찰과 과거 기록의 행위를 통해 숨은 나 자신이 더 또렷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내 안의 또 다른 목소리를 세상으로 꺼내고 싶다. 그러한 작가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온몸으로 관찰하고 기록할 것이다. 남들에게는 24시간뿐인 하루가 작가가 된 이후 나에게는 3시간 더 늘어났다. 하루에 3시간을 습작의 시간으로 스스로와 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내게 습작의 3시간은 하루 24시간에서 그 시간만큼 보장받은 셈이다. 맛깔스러운 글을 쓸 재주는 아직 부족하지만, 내 글을 통해 독자와 작가 모두가 자신의 깊은 곳을 관찰하고, 보듬어 주고, 때로는 화도 내주어가며 스스로를 용납할 수 있는 정갈한 글을 내보이고 싶다. 내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27시간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