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청년의 변변찮은 사정
젊은이들의 수다가 멀어질 때쯤 그는 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했다. 2년 하고도 두 달째 다달이 돈 4백만 원은 부금 1에서 26으로 바뀔 때까지 매달 정확히 11일 12시 12분에 입금되었다. 잔액이 일억 사백만 원이 넘고 있었다. 일십백천만십만백만천만일억... 그는 아홉 개의 숫자를 짚어가다 마지막 일억을 확인하고는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옹골지게도 이자까지 꼬박꼬박 쌓여만 가는 1억은, 길태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옆에서 조용히 자신을 훔쳐보던 앵두나무를 보고는 서둘러 폰을 주머니에 숨겼다. 그리고 앵두나무의 앵두 중 가장 실하고 통통한 걸로 골라 엄지와 검지로 톡 따서 손끝으로 동글동글 굴리다가 툭 그 앵두를 터트려 짓이겼다. 씨앗이 툭 튀어나올 때까지. 시큼한 앵두향이 그의 손끝에서 피처럼 뚝뚝 과즙을 떨어뜨리며 퍼져나갔다.
낡은 잿빛 운동화를 반쯤 벗어 꼼지락거리며 그는 다시 칸막이 열람실 책상에 앉아 있다. 길태가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집 근처 가좌 도서관은 개관한 지 오래되어 시설이 낡고, 공간이 비효율적이다.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는 이를테면 자료실에서 책을 고르다가 잠깐 앉아 책을 훑어볼 때면 창가 히터에 걸터앉아야만 했고, 책을 막상 빌려 읽으려면 당구장과 컴퓨터 수리점을 지나 4층 열람실에서 좌석을 예약해야 앉을 수 있다.
학창 시절,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입꾹닫이로 지내던 길태는 늘 여기저기 뜯어지고 구겨져서 손질 안 된 교복차림으로 풍선 인형처럼 팔다리를 흔들며 보냈다. 자주 다치고, 자주 엉망이 된 길태에게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사춘기도 모르고 지나간 그가 한창 성장기였다는 걸 알아챈 건 알랑한 청년의 부모도 아니고, 그나마 가끔 학교 급식실을 찾아오는 마음 넉넉한 배식담당 자원봉사자들 뿐이었다. 아침 한 번 제대로 얻어먹고 다니지 못하고, 늘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다 남은 술안주용 배달음식으로 저녁을 때웠던 그는 또래보다 왜소했고, 영양불균형인지 피부병으로 여기저기 버짐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봉사단체가 오는 날이면 길태는 누구보다 맛있게 학교급식을 꾸역꾸역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그 당시 어리숙한 자신을 위해 누군가가 덤으로 푸짐하게 얹어주는 고깃국을 학생 박길태는 알아채지 못했다.
지금의 청년에게 고작 정 붙일 대라고는 일방적인 소통만으로도 최고의 효율을 얻을 수 있는 도서관의 책들뿐이었다. 청년은 꽃 같은 세월을 변변한 친구 한 명 없이 가좌 도서관에서 무료 교양강좌나 과학, 역사 이야기 같은 인문학 강의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디 한번 세상 누구에게도 짜증을 내거나, 반항의 눈빛을 내비치지도 않고 여리고, 순하고 소통 없이 조용하게.
청년은 가좌도서관에서 세월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통장만 지켜보며 지낼 수밖에 도리가 없었고 딱히 무엇인가를 해낼 수도, 하고 싶었던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길태의 꿈은 어느새 부금 4백만 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통장의 돈들을 꺼내 쓰리라는 꿈을 키우며 보냈다. 그는 여하튼 지금으로서는 돈 많은 백수로 존버 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