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sd Apr 12. 2023

친애하는 S에게

2023.04.03. 월요일


 나에게 있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아있다. 이미 인간의 육체로 살아가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특히나 나는 남들보다 자존감도 바닥을 치고, 잘하는 것도 없고, 무엇이든 게을러서 미루기 일쑤이며, 미래에 대한 걱정도 준비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미운 스물 넷이다. 여기 나와 같은 날에 태어났지만 성격도, 지향도, 살아가는 방법도, 그동안의 경험도 반대의 길을 향하는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S다. 이 글은 S가 써준 글에 대한 회답이자 내 인생을 구해줌에 대한 찬사이다.


 S는 내 자존감이 어느 때보다 바닥을 칠 시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희망만 겨우 붙잡아가며 연명해가고 있던 시기에 만난 친구다. 같은 학번, 진정 ‘한줌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인원이 적은 학과 속에 같이 머물러 있던 친구. 1학년일 때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하지만 눈에 띄는 친구였던 것 같다.

그 당시의 S는 집보다 밖을 사랑하고, 주변인 역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친구가 몇 없는 나와 달리 손가락 발가락을 동원해서 세어봐도 그보다 많은 것 같았다. 언제나 집 앞 마트로 가는 차림을 하는 나와 사람들의 눈길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을 꾸미고 다니는 S. 이런 사람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S와 가까워지기 시작한 건 2022년 11월부터였다. 항상 친해지고 싶어 멀리서만 바라보던 사람과 당신이 가까워진다면 그 감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S와 가까워진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수업만 같이 듣다가, 나중에는 영화도 보러 가고 사진도 찍고.. 2023년에 들어서고부터는 비록 학교에서 가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일본, 즉 해외도 같이 다녀오고 1교시 수업을 위해 통학이 힘들 걸 알고 일요일마다 나를 조건 없이 재워주기도 한다. 1년 정도 알아간 사람에게도 함부로 열기 힘든 것들을 S는 고작 4개월 알아 간 사람에게 열어준 셈이다.


 일요일마다 3시까지의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기름냄새를 씻어낸 후, 보부상마냥 가방을 부랴부랴 싸서 설레는 마음으로 S의 집으로 향한다. 2시간의 여정이 외롭지 않고 오히려 기다려진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집에 들어 가 S와 만나면 기약을 맺은 것처럼 하는 그곳만의 루틴이 있다. 저녁을 같이 먹고, 달이 휘영청하게 떠 있는 곳 아래로 짧게나마 산보처럼 오고 가는 편의점, 돌아오고 나서는 자유롭게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쓰고 책을 읽는다.

비록 나는 이미 공강 없는 평일 4시간의 통학시간 동안 잠을 자거나 책을 읽지만 (S의 집에 가는 일요일도 포함하면 2시간이 추가된다) S와 함께 수면등 같은 주황빛 조명을 켜고 같이 책을 읽는 시간이 좋다.

책을 읽고 나면 자기 전까지 대화를 나눌 때가 있는데, 이때는 마냥 가볍고 재미있는 대화만 오고 가진 않는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희망만 겨우 붙잡아가며 연명하던 때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그 속내를 아직은 풀고 싶은 건지, 나도 모르게 새벽만 되면 S에게 투정을 부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 찝찝함이 남는 대답과 위로가 돌아와 기약 없는 약속을 한 것 같은 끝이 맺어져 억지로라도 씁쓸한 웃음을 짓곤 했는데, S는 다른 방식으로 우울함을 가졌던 사람이라 그런지 남들과는 달리 나에게 필요한 조언과 위로의 말을 건네준다. 이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항상 고마워하고 있고 언제든지 나도 그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간다. 나의 불행보다 남의 불행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듣는 것에 인색한 사회에 살고 있지 않나. 이런 사회 속에서 누군가의 개인적인 불행을 들어주고 싶어 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가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모두가 까무룩 잠이 들고, 가게의 조명들도 꺼져가는 새벽 시간에 숙면을 미뤄가면서 시간을 할애해 주는 건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S가 나에 대해 글을 썼다고 했다. 처음엔 솔직히 놀랐다. 나같이 보잘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쓸 게 한 문장 아니 한 단어라도 있을까 하면서. S는 물감이 색상별로 짜여있는 한 판의 팔레트 같고, 다채롭게 주변인들을 물들여가는 존재인데, 그런 다채로운 색을 덜어내는 데에 사용하는 양동이의 탁한 물 같은 나를 담아내기엔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S의 글에선 내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처럼 비춰져있었다. 글을 읽고 나서 돌아보니 나 자신을 스스로 닳도록 깎아내리며 살아온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영화나 책과 같은 문화생활을 나처럼 꾸준히 즐기는 사람이 내 친구들 중에서 몇이나 될까. 몇 권의 책이 넘겨지고 몇 편의 영화가 흘러가는 과정 역시 꾸준히 해왔기에 나를 설명하는 한 부분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난 그런 점을 알게 해 준 S에게 최근에 인상 깊게 읽은 인생 책을 빌려주었다. 좋은 구절이 셀 수 없이 많아, 책 윗 모서리가 절반 이상 접혀있는 채로 건네줘서 부끄럽지만, S가 읽으면서 좋아하는 구절을 다른 펜으로 그어주길 내심 바라왔다. 앞으로는 좋아했던 영화나 보고 싶었던 영화도 같이 볼 수 있는 순간을 가지려고 한다. 다채로운 팔레트지만 물이 없다면 그림을 완성할 수 없지 않나. 투명한 물이 탁해지고 못나져도 좋으니까 멋진 작품을 위해 가차 없이 물들여가줬으면 좋겠다.


 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기엔, 세상은 너무나도 거대하다. 작은 빛 하나를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거나 희미한 점처럼 보일 텐데, S와 함께 빛을 낸다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인생을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혹한기가 올 때도 있는 거고 장애물이 난무하는 때도 있는 거다. 그걸 이겨내는 과정 역시 하나의 경험을 했다고 느낀다면, 그렇게라도 시나브로 성장해 나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실패를 한다는 것도 하나의 증거인 거다. S는 나에게 세상의 그런 면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악착같이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다. S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노력도, 이유도 없이 내 육체의 종족을 혐오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식으로 뇌를 빼고 살아간다면, 희망 없는 세상이라도 연명하며 겨우살이처럼 살아갈 텐데, S가 비어있는 세상이라면 살아가지 못할 것 같다. 스물넷의 시작이 좋다. 어느 해보다 살아가기 딱 좋은 날들로 비춰지고 있다. S가 있기에 내 스물넷은 찬란하게 빛이 날 것 같다. 스물다섯스물여섯 나이는 중요하지 않게 앞으로도 그럴 거다.

작가의 이전글 뛰어들지 않으면 모를 '가난'의 정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