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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Jun 27. 2023

요양이라는 말

요양이라는 말


소파 철제 다리에 엄지발가락을 부딪치곤 어쩔 줄 몰라 끙끙대는 것과 같다. 말문이 막히는 가슴 답답함과 통증에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엄마, 다음 주에 갈게요.” 일부러 올 필요 없다는 끝인사로 통화를 마치기 전 “일하는 날도 쉬는 날도 요양원만 왔다 갔다 하네…” 애써 웃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휴대폰 안에 한참 고여있다. 그 자세로 멍하니 있을 상대의 모습이 그려지는 게 싫어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나이차가 스무 살이 채 나지 않는 내 엄마의 엄마는 벌써 오래전 자식들을 경계하며 가시 박힌 벽을 세웠다.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 아닌, 훤히 들여다 보이는 거칠고 위태로운 벽이다. 본인이 원하는 때만 열어젖혀 밖으로 분노에 찬 요구를 외친다. ‘완전한’ 치매는 아니라고 들었지만, 전문가 진단과 관계없이 손녀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완벽히 사라졌다.


외가댁에 가면 곧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싱크대 앞에서 반기시는 할머니는 급히 손을 닦고 머리부터 어깨까지 반복해서 나를 쓰다듬으셨다. 반질반질 예쁜 광이 나는 사과 한 알을 다루듯. 뭐가 먹고 싶은지 묻고 또 묻던 가벼운 목소리는 함부로 낸 역정 탓에 탁하게 쉬어버렸다. 자신을 지켜내려 입은 미움과 분노라는 갑옷의 무게에 구순의 몸은 버티지 못한다. 할머니의 상체는 굽어졌고 치켜뜬 날카로운 시선으로  타인을 본다. 요양보호사로 ‘주-주-야-야-비-비’ 교대 근무하는 엄마는 쉬는 날 하루는 요양원을 검색하여 문의를 하고, 다른 하루엔 몇 곳을 직접 방문 상담하며 몇 주를 보내고 있다. 요양원만 왔다 갔다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는 말 그대로다. 통화 내내 곁에 있던 남편은 눈물 밸브를 꾹 붙잡아 닫고 있는 나를 눈치채고 “장모님 안경 바꿔드릴 때 됐어. 이번주에 가면 되겠네.” 모르는 척 방문할 이유 한 가지를 덧붙인다. “할머니 미워 죽겠어. 대체 딸한테까지 왜 그러시는 거야!” 네 살 아이의 칭얼거림 같은 말이 눈물을 대신해 터져 버린다. 해조류처럼 바닷속을 부유하며 살겠다는 농담을 엄마에게 ‘진심으로’ 여러 번 했다. “그래, 타고난 일복을 네가 닮아서,,,” 철없다며 눈을 흘기거나 쥐어 박지 않았던 건 엄마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 세대를 뛰어넘은 원치 않는 공감이다.


‘나이 들면 요양원에 들어가서 고요하게 삶의 마지막을 보낼 거야.’ 여전히 유효한, 거짓 아닌 그때의 말을 요양원이 근무지인 엄마, 보호자로서 요양원 입원 절차를 완료한 엄마에게 이제는 절대 할 수 없다. 요양원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머문 공간을 어둡게,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 자동 OFF 또는 차단 버튼이 되었다. 퇴근길 옆 사람의 숨소리마저 또렷한 밀집도 높은 지하철 객실에서 내리자마자 환승 플랫폼에서 '어마마마'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늘은 비번, 아직은 주무시기 전이라는 걸 확인한 후다. 일부러 묻지 않은 말을 엄마가 먼저 꺼낸다. “너도 걱정 마, 할머니 잘 계신대. 안정 때문인지 면회는 좀 더 있다 오라고 하더라.” “응 알았어, 잘 됐네.” 괜찮다는 확신과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이란 걸 딸인 나에게 들키고 만다. 엄마의 퇴짜에도 일요일엔 든든한 방패인 손녀와 사위를 앞세우고 새 안경을 핑계 삼아 보러 갈 것이다. <여성 시대> 11월 호, 12월 호 두 권을 챙겨 놓는다. ‘엄마를 늘 생각하며 지내요.’ ‘엄마가 기뻐하는 걸 보고 싶어요.’ 입술 밖으로 터뜨리지 못하는 사랑한단 말을 대신하는 행위이다. 아이가 한 주 미리 드리는 생신 축하카드를 책자 페이지 안에 잘 숨겨둔다. 직장에 제출해야 한다며 프린트를 부탁받은 온라인 필수 교육과정 <수료증>은 표지 다음 첫 장에 눈에 띄도록 끼워 놓는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결국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그 절실함이 너무 솔직하고 날 것이라 사랑하는 상대와 나만 아는 비밀에 부쳐야 할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온전한 행복을 위해선 누군가를 미워하고 ‘그만 나가주세요.’ 거리를 두려는 냉정하고 이기적인 감정이 드러나버려 두렵다. 아이는 인터넷 검색창을 활용할 줄 알게 된 어느 날, 아빠와 엄마의 회사 이름을 하나씩 차례로 입력했다. 클릭할 때마다 생기는 새로운 페이지가 재미있는지 한참을 보았다. 이해 못할 사진과 영상을 성의 있게 관찰하더니 내가 하는 일은 이 중에 어떤 거냐며 궁금해했다. 엄마가 일하시는 요양원 이름이 떠올라 검색창에 입력한다. ‘효** 요양원’ 화면에 코가 닿을 듯 잔뜩 들떠 질문을 쏟아냈던 아이와 달리, 요양원 홈페이지 상단 메뉴를 하나씩 눌러 확인한 단어와 문장들은 날카로운 기계식 키보드 소리처럼 아프다. 한파 예보가 지나고 올겨울도 끝나면 예순 중반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에 성공했던 2019년과 같은 봄이 올 것이다. 요양이라는 말에서 새로운 도전과 단단한 의지를 꺼냈던 4년 전 엄마의 봄날처럼. 나는 엄마의 영양제와 작고 얇은 월간 책자를 꼬박 챙기는 것으로 엄마의 월동 준비를 돕는다.    


December 1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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