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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인 Jun 27. 2023

기대도 괜찮을

기대도 괜찮을


아침 6:55 지하철 객실, 출퇴근 경로 중 유일하게 좌석에 앉을 수 있는 2개 역 소요 5분은 달콤하다. 당연해서 더는 욕심을 내거나 아쉬움이 남은 적도 없다. 환승역 문이 열리면 미련 없이 벌떡 일어나 1호선 밀집도 높은 객차 안으로 몸을 태운다. 좌석 바로 앞 손잡이를 붙잡을 수 있는 공간만 차지해도 운수 좋은 날, 자리에 앉은 것만큼 든든한다. 빼곡하게 채운 필기 노트를 얼굴 가까이 댄 학생이 내 어깨 왼쪽에 선다. 노트 옆 삐져나온 인덱스 테이프에 급수/다변수/공학이라는 글자가 차례대로 보인다. 시선을 길게 두면 훔쳐보는 듯하여 급히 읽고 있던 책 페이지로 거두어 온다. ‘편입 수험생인가. 나에겐 진짜 미지의수 X, Y로 가득한 해독 불가한 암호로만 보여요. 노트 들여다봤다고 기분 나빠 말아요.’ 


환승 후 2개 역까진 모든 것이 괜찮다. ㅇㅇ역 도착 안내 방송에 반사적으로 손잡이를 힘껏 움켜잡고 숄더백을 더 정면을 향해 고쳐 맨다. 차갑고 비릿한 한겨울 특유의 바깥공기 냄새와 함께 사람들이 객실 내로 한꺼번에 밀치고 들어온다. 나란히 선 학생도 펼친 노트를 더 꼭 붙드는가 싶더니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되어 계속 뒤를 힐끔거린다. 고개뿐 아니라 어깨를 크게 틀어 뒤돌아보는 동작에 이상함을 감지한다. 학생 뒤로 한 뼘 이상 높고 넓은 등이 닿아 있다. 손잡이에 매달리듯 움켜 잡은 우리와 달리, 등을 마주댄 그는 분명 튼튼할 두 발을 바닥면에 힘 있게 딛지도, 기둥같이 단단한 몸으로 균형을 잡으려는 의지도 없다. 촘촘해 넘어질 수 없는 간격을 핑계 삼아 자신의 등 뒤의 사람을 벽인 양 아무렇게나 기대어 큰 몸을 휘청거린다. 학생은 3-4초 간격으로 뒤를 돌아보며 자신을 향한 무례한 무게를 떨치려 안간힘을 쓴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듯 방어용 밀침을 짧게 가하지만 효과가 없다. 짜증섞인 한 숨 소리가 들린다. 강한 의지로 손에 받쳐 든 노트를 결국 한 줄도 더 이상 머릿속에 넣지 못했을 거다. 나 역시 ㅇㅇ역 이후 페이지 한 곳에만 눈이 머물고 있다. 나의 예상대로 도착역이 노량진역이라면 앞으로 한참 남았는데,,, 학생의 얼굴을 용기 내 바라보며 “이쪽으로 서세요. 저 이번에 내려요.” 내어 준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그의 등과 어깨가 잠깐이라도 쉬었으면. 일면식 없는 사이라 결코 해 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되뇐다. ‘자신의 형태를 온전히 지키려 애쓰면 더 힘들어요. 날선 긴장을 내려놓고 흔들리는 인파의 몸짓대로 흐름을 타면 좀 나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늘 부러질 듯 꼿꼿한 내가 주제넘는 조언을 혼잣말처럼 떠올린다.

  

기억도 나지 않는 작은 의견 불일치를 시작으로 저녁 식탁 위 공기가 차게 식은 날이었다. 파이 속 겹겹이 성긴 층같이 빈 곳 많은 내 몸 사이를 남편과의 날선 대화가 마구 휘젓는다. 손가락으로 집는 작은 힘에 파사삭 내 감정은 깨지고 부서져 화를 내고 만다. “미안. 정말 미안해. 사실 오빠 때문이 아니라,,, 오늘 회사에서 너무 힘들었나 봐!” 부끄러움과 서러움에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지만 마지막 남편의 말은 선명하다. “우리 힘들어 터져버리진 말자. 곪더라도 서로가 눈치챌 수 있게 서서히 아프자. 당신이 가끔은 너무 버티지 않았으면 좋겠어.” 


현실의 나는 겉으로 보기엔 단단하고 뻣뻣하지만 안은 물기 없이 말라 텅 비어있는 줄기일지 모른다. 몸을 바르게 세우기와 유연해지기 그 중간의 운동이 요가와 필라테스였다. 나도 몰랐던 살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구나. 긴장하여 바짝 쪼그라든 몸 곳곳에 깊은 호흡을 불어넣는 훈련을 성실하게 한다. 아이는 퇴근한 내 주위를 위성처럼 맴돌며 끊임없이 말을 건다. 설거지할 때조차 내 몸에 기대는 아이에게 “물 튀는데 저리 좀 가 있어.” 이제 자신의 몸에 힘을 주고 혼자 서있을 나이지 않냐는 잔소리를 보태려다 멈칫 한다. 내 공간, 바른 위치를 지키려다 영영 외로운 위성으로 남겨질까 봐. 내 몸 중심에서 보폭을 반쯤 벌려 유연한 휘청거림으로 가끔은 상대에게 기대도 괜찮은 거다. 내 몸은 앞으로도 160cm, 50kg을 넘지 않는 결코 위협이 되지 않을 작고 작은 몸이니까.


January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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