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의 [시간]
제 기억 속 할아버지는 그냥 못된 사람이었어요. 이모들 괴롭히고, 할머니 못살게 구는 그런 사람이요. 저녁밥 안 먹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새벽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갑자기 배고프다며 이모에게 밥 차리라고 시키고, 할머니가 아픈데 병원도 못 가게 하고, 젊었을 적에는 주먹도 휘두르며 가족 못살게 하고.
그냥 하루빨리 가족들이 할아버지에게서 벗어났으면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할아버지의 몸 상태가 매우 나빠져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남들은 다 죄송하다며 울었지만,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패륜아 같죠? 여러분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뭐. 그런데 어떻게 해요. 지금 할아버지가 입원해야 남은 가족들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텐데.
정말 솔직한 제 마음을 고백하자면, 할아버지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랐어요. 할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는 우리 엄마랑 이모들, 그리고 할머니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요. 그 사람 때문에 자꾸만 싸우게 되는 상황이 싫어서요. 그리고 2024년 3월 1일 새벽, 위독하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엄마에게 연락이 왔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요. 그때도 전 별생각이 없었어요. ‘결국에’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죠.
장례 둘째 날, 염한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뵀습니다. 커다란 관 속에 백색 수의를 정갈히 입고는 누워계셨는데, 그렇게 크고 무섭던 사람이 저렇게 작고 약해진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래도 울지 않았어요. 슬프지는 않았거든요.
이후 저희는 할아버지를 현충원에 안장하려고 했습니다.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도 받은 국가유공자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장례 둘째 날이었어요. 갑자기 국가에서 국립묘지 안장 거부처분 통보가 내려졌습니다. 사유는 군복무 중이었던 ‘과실치상’이라는 전과. 저희는 안장 거부처분 취소 청구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변호사 말로는 무슨 군복무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연히 뭐 공공기관에 서류는 있겠지 싶어서 입증 자료를 찾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어느 곳에서도 할아버지의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가 찾을 수 있었던 할아버지 관련 자료는 해병대 출신이라는 누군가의 블로그 하나였습니다. 고작 하나요. 월남전참전자회, 해병대전우회, 군 관련 공공기관, 그 어느 곳에 문의해도, 검색을 해봐도 저희 할아버지의 성함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우리의 기억을 탈탈 털어 알아낸 것은 할아버지가 절대 군대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던 것뿐이었습니다. 생전에 할아버지는 사위 중 저희 아빠와 가장 가깝게 지냈어요. 아빠가 좀 눈치도 없고 해서 할아버지가 뭐라 해도 ‘엥 아버님 그거 아닌데요?’라며 당당하게 말하곤 했었거든요. 그런 모습이 나름 편하셨었나 봐요. 아무튼 아빠는 할아버지 생전에 군대 이야기 좀 해달라 조른 적이 있대요. 정말 꾸준히, 몇 년 동안 졸랐었는데 결국 돌아온 답변은 군대에서 나올 때 비밀 유지 각서를 쓰고 나왔기 때문에 절대 말해줄 수 없다는 거였어요. 아빠는 전역한 지 몇십 년도 더 되었는데 그런 거 상관없다 했지만, 할아버지는 굳게 입을 닫으셨대요.
그리곤 어찌어찌해서 할아버지의 과거 이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월남전 참전 이후 무공훈장을 받고 나서 할아버지는 북파공작원 교관의 임무를 수행하셨대요. 그리곤 또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외의 자료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었거든요.
어쨌든 작은 증거들을 가지고 열심히 청원서를 작성했어요. 그리곤 다행히 국립묘지 안장 거부처분이 취소되었습니다. 이후 저희는 할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셨습니다.
아이고,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렸네요. 아무튼 할아버지를 현충원에 모시고 나서야 가족들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어요. 물론, 할머니는 여전히 힘들어하셨지만요. 그렇게 두려워서 피하고 싶다던 할아버지가 막상 사라지니 이제는 그 사람이 너무 그리워 마음 아파하는 할머니가 너무 답답했지만, 함께 산 세월이야 어찌할 수는 없더라고요. 저는 그냥 할머니 곁에서 할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는 척하며 조용히 할아버지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할머니를 위하는 길이었으니까요.
이렇게까지 할아버지를 원망하던 제가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였어요. 축하받아 마땅할 생일, 어린 일수 씨는 그럴 수 없었대요. 자신을 낳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요. 그런 아내를 잃은 아버지는 일수 씨에게 화풀이를 해댔고요. 거의 뭐 고아처럼 자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살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하셨대요. 그러곤 월남전도 참전하고…. 전쟁이었으니 사람이 죽는 것도 많이 목격하셨겠죠? 당연히 PTSD는 물론이거니와, 정신적으로 엄청 힘드셨을 거예요. 거기에 그 시절 아버지로서 6식구를 책임져야 했으니 얼마나 책임감이 막중했겠어요. 그렇다고 가족들에게 두려움과 실망감을 안겨 준 그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요, 그저 그 사람이 안쓰럽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 마음속 상처는 점차 아물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는 훨씬 상태가 좋아지셨고, 저도 조금 더 성장했어요. 그래서일까요,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지 조금이나마 알겠더라고요. 어쩌면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나 아프다고, 힘들고 두렵다고, 나 좀 챙겨달라고, 내 곁에 좀 있어 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몸만 노인이지, 마음만은 가족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아픔에 병든 어린아이일 뿐이었을 거예요.
김창완 아저씨의 <시간>을 처음 듣자마자 할아버지가 생각났어요. 여전히 그를 그리워한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지만, 그리고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말해주고 싶어요. 그냥 다 잊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리고 평생 잊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