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던 음식이 좋아졌습니다

없어서 못 먹음

싫어하던 음식이 시나브로 좋아질 때가 있습니다. 비로소 “어른의 입맛”을 갖추었다 말하죠.

괜히 성숙해진 것 같아 우쭐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어른의 맛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 것인가 한참을 생각하다 돈의 맛은 아닐까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어른이 되면, 내돈내산이 가능하니까요.

콩국수

여름이 되면 콩국수가 생각납니다. 꼬꼬마 시절 파블로프의 개 마냥 여름 하면 냉면과 아이스크림! 자동 반사였는데, 지금은 곧 죽어도 콩국수입니다. 어릴 때는 끔찍이 싫어했던 그 콩국수말이죠.

걸어서 5분 거리에 살고 계시는 할머니에게는 월간음식이 있습니다. 어느 달은 맨집(울산 향토음식)을 한솥 끓이시기도 하고요, 동지 언저리에는 팥죽을 몇 통씩 준비하십니다. 콩국수는 할머니의 여름 메뉴였어요. 희미한 기억 속, 할머니집 식탁에는 맷돌이 있습니다. 스댕 다라이 속 맷돌은 베이지색 콩물을 내뿜고 있었어요. 부엌 가득 콩 비린내가 진동을 했습니다. 맛보기도 전에 질려버리는 비린내였죠.

콩을 싫어하던 사촌들도 한 몫했습니다. 군중심리에 이끌려 나도 콩을 싫어한다 착각하기 딱 좋은 환경이었죠. 그래서 제대로 먹어본 적도 없는 콩국수를 무조건 싫어했습니다. 우연히 혀 끝에 닿은 간이 하나도 되어 있지 않던 콩물이 콩국수에 대한 기억 전부였습니다.

정확히 어떤 콩국수를 먹고 좋아하게 됐는지 기억은 나질 않아요. 하지만, 세상에 맛있는 콩국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먹을 콩국수를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나서 입니다. 소금 넣는 경상도식, 설탕 넣는 전라도식, 걸쭉한 콩물, 부드러운 콩물, 소면, 칼국수면, 유명한 전문점, 분식집 메뉴 중 하나. 다양한 콩국수에 궁금증을 가지고, 선택하고, 찾아가고, 돈을 지불하는 것. 어른만이 할 수 있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저는 콩국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돈 있는 어른답게, 올여름은 콩국수 지도를 만들어볼 계획입니다.

돈까스

돈까스는 전국 공인 초딩입맛의 대표 메뉴입니다. 칼국수집에 가도 어린이 메뉴로 돈까스정식이 있고요, 가족 손님을 잡기 위해서 매운 음식점의 돈까스 메뉴는 필수입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 속 돈까스는 쥐포만한 두께에 바삭한 척하는 눅눅한 음식이었어요. 그 시절 제가 주로 먹던 돈까스는 백화점 지하 정육코너에서 팔던 얇디얇은 돈까스거나, 학교 급식에서 나오는 것이거나, 뷔페 한켠 질서 없이 쌓인 조각 돈까스였습니다. 육즙은 사치요, 식감조차 느낄 수 없었던 돈까스들과 가뜩이나 소스를 좋아하지 않는 제게 주어진 달큰한 데미그라스 소스. 친구들이 돈까스를 외칠 때, 저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돈까스 세계가 열렸어요. 2d던 내 머릿속 돈까스가 사실 3d였음을 알고 약간의 분노도 느꼈죠. 엄마한테 왜 어릴 때 제대로 된 돈까스 한 번 사주지 않고, 집에서 정육점 돈까스를 구워줬냐 따진 적이 있는데요. ‘그게 더 건강한 줄 알았지’라는, 반박하면 다소 불효녀스러운 답변을 받았습니다.

치즈돈까스, 고구마치즈돈까스, 돈까스 카레, 가츠동, 돈까스냉면. 이 무한한 돈까스 세계를 알게 된 것은 내 마음대로 돈은 쓸 수 있지만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이고요.

히레카츠, 로스카츠, 저온숙성카츠, 규카츠. 이 고급지고 디테일한 돈까스 세상을 알게 된 것은 씨발비용이라는 것이 부쩍 는 돈 있는 직장인이 되고부터입니다.

아 참,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돈까스는 소금과 와사비를 얹어 먹는 부드러운 히레카츠입니다. 물릴 때쯤 양배추 듬뿍은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