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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grace Mar 15. 2024

출산하지 않을 권리.

차별을 차별이라 말할 수 있는 어른.

생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나는 태초의 바다 아래서 그야말로 무의미하게 둥동 떠다니는 단순한 세포에 불과하다. 지천에 널린 특별하지도 않은 성분으로 우연히 만들어진 의미 없는 물체.

이 사실을 숱하데 들으면서도 전혀 진부해지는커녕, 들을 때마다 매번 소름 끼치게 감동적이다.


그런 관점에서 호모사피엔스라는 인류가 세상의 우두머리인 양 거들먹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가소롭다. 현 인류로 진화하기까지 과정이 대단히 계획적이거나 지능적이지 않다는 점. 현 인류가 시작한 지 3만 년이나 지났다는 점이 조금은 열없기도 하다.

정말 찬란하도록 쿨한 이론이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 현재 인간들의 불합리하고 치졸하고 잔인한 부분들을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가볍게 설명하려 들려는 의도가 불편하기도 하다.


그중에 가장 불합리하고 치졸하고 잔인하고 불편한 것이 바로 "그들이 그들에게 저지르는 차별"이다.

그중 가장 진지하게 분노하는 지점이 "성 차별"이다.

너나 나나 무의미한 먼지인 주제에.





나는 99% 여성 이란 조건에 부합하고, 또한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딸" 세 명을 키우고 있다.

그런 와중에 세상은 불공정하고 부도덕하고 비열하다.

내가 오로지 나로서만 살아도 될 때는 알지 못했던 분노와 절망이 나를 들끓게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세 번의 출산을 경험하고 나서였다.

내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워 출산과 육아가 평생 이어진다고 해도 행복할 것 같다고. 나는 육아가 체질인 것 같다는 말에 같은 동료(?)들에게 야유를 받으면서도 나는 나의 모성이 감개무량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두려웠고 그래서 단호했다.  갑옷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무사의 마음으로 각오했다.


나는 차별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차별에 맞설만한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세뇌된 나의 착각이란 것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차별에 무뎌져 피해자보단 가해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착한 며느리, 희생하는 딸, 고운 아내, 현명한 아내가 되지 못하는 것을 직무유기처럼 느끼며 차별당하는 쪽의 행실을 운운하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차별주의자, 편견주의자였던 것이다.


태어나 길러지는 동안 오빠와 비교되었던 걸.

중고등학교 시절 남자 선생님에게 숱한 성희롱 발언을 단순한 불쾌감으로만 끝냈고.

만원 버스 안에서 내 허리 위쪽에서 느껴졌던 아랫도리의 뜨겁고 물컹한 느낌을 참아내던.

역시 버스 안에서 계속 올라가는 교복치마 단을 잡으려다 낯선 성인 남자의 손과 마주쳐 얼굴을 하얗게 질려 울기만 했던 날을.

그런 날들을 나는 모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세 딸들이 자라고 큰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 기억이 불현듯 되살아났다.

그리고 망연자실 아이만 조심시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차별을 당하더라도 지금 내가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야지. 그래서 내가 나를 지키고, 함께 지켜가자는 말은 꺼내 볼 수 있어야지.

여전히 내가 행하고 있는 차별과 편견을 깨닫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선한 주변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차별적 발언과 행동을 할 때 우아하게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배우고 알아가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배우면 나누고 싶어 진다.

하지만 정작 내 속까지 모두 까서 보여줄지 언정, 차별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고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려는 분위기만 풍겨도 이상하리만큼 남성을 두둔하려 했다

'남자들도 힘들어' '요즘 여자들이 좀 심하긴 하지' '남편 생각하면 나는 편하긴 하지'

언제들 이렇게 남편의 사랑들이 지극했는지 갑자기 배알이 꼬였다.


여자들이 그렇게 입고 다니니깐 그런 사달이 나는 거야! 친정엄마의 말에 칼날을 세워, 엄마 딸인 나도 당한 적이 있다고  소리쳤다.

'다들 여자면서, 다들 딸 한 명쯤은 키우는 사람들이면서!' 그들의 무지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참으며, 거기에 대해 차분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설득하지 못하는 나의 더한 무지함에 자괴감이 느껴져 며칠을 분해했다.


여자들은 스스로 자신과 자신이 하는 일을 낮추는 데 익숙해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정작 차별을 당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

설사 내가 차별을 당한 적이 있어도 나는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 그들과 '여성 차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이야기만큼 위험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이 뿌리 깊은 차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인류 전체의 역사를 보면 시작에는 모계중심사회가 있다고 본다.

모계 중심 사회라고 하여 여자가 남자를 지배하는  관계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저 엄마가 낳은 자식들이 중심이 되어 부족이 구성될 뿐이다.

 '너희 엄마는 누구야?'가 자신의 정체성을 구분 짓는 사회. 그러다 남성들은 땅을 정복하듯 여자들의 성을 지배했다.


여성들은 강력하게 저항했을까?

내 생각으로 순응했을 것으로 본다.

모계사회는 결코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 속에서 내 아이를 지켜내는 쪽보다 애초에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남자는 여성을 정복하고 그 뒤는 돌보지 않은 채 거사를 위해 떠나버린다.

원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 모든 과정조차 '진화론'관점에서 해석가능하다고 한다면 조금 억측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차치하고.


지금 역시 형태가 조금 더 유해졌을 뿐, 보호하고 보호받는 프레임 속에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정해졌다는 사실은 크게 변화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보호받고 싶어 하는 남성과 보호하려는 여성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여성을 임신과 출산을 게을리하고 남성의 자리를 넘보는 염치도 모르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세상 역시 아직 이 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정말 종 잡을 수 없는 사회다.


그렇다면 정말이지 임신과 출산을 무기 삼아 세상을 뒤집어엎고 싶다는 치기 어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여성은 임신하지 않을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성관계가 있으면 임신의 가능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생물학적 한계.

심지어 출산하지 않을 권리까지 위협당하는 사회.

태아의 생명을 옹호함과 동시에 '너의 부도덕함을 너 혼자 책임져라'라는 잔인한 압박.

양육에 대한 전적인 희생과 책임을 강요.

그러면서 피해의식에 절었다는 질타.

배가 불렀다는 비아냥. 결국엔 역차별의 발언들까지.


이 모든 걸 책임지고, 내 딸들을 이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나의 분노와 절망, 두려움을 이겨내기엔 나는 너무 게으르고 나약하다.

그저 단 한 명이라도 나의 두려움을 알아주길. 그래서 함께 소리 내줄 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계속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차별을 차별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어른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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