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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혹성 May 11. 2022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

'착하다'의 의미

‘착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함’이다. 그러나

나에게 ‘착하다의 의미는 내 의견을 내지 않는 것’이었다.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웬만하면 상대방의 요구에 거절하지 않으며 상처 주지 않으려 애쓰고 양보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그렇게 세뇌하면서 결혼 생활을 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에게는‘착한 며느리’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이 타이틀이 나에게 가져다준 것은 마음에 깊이 새겨진 상처들과 해결해야 할 어떤 과제였다.     


나의 상처 이야기 

첫 번째 상처는 무심함의 상처였다.

둘째 임신 후 ‘자연유산’을 한 다음날로 기억한다.

설날 연휴였기에 신랑은 두 살 된 딸아이를 데리고 시댁에 갔고, 나는 힘든 마음을 추스르면서 집에 있었는데 남편한테서 전화가 왔다.

“형수님이랑 형들 다 와 있는데 얼굴은 비춰야지.”

‘과연 얼굴만 내비치고 올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 몸은 시댁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댁은 걸어서 10분!  코앞인 것도 한몫한 것 같다.      

예상대로 나는 대가족이 먹고 난 저녁상 뒷정리와 설거지를 다하고 느지막이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시댁 식구들은 그 누구도 나에게 위로의 말도, 쉬라는 말도, 집으로 얼른 가라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이 상황 속에서도 나는 ‘유산이란 게 출산과는 다르게 덜 힘들긴 하지’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시댁 식구들의 반응을 애써 외면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상처가 깊게 박혔다.     


두 번째 상처는 어이없음의 상처이다.

딸아이가 6살, 아들이 3살 되던 해 ‘부천님 오신 날’의 일이다.

어린이 대공원으로 가족 나들이 가기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김밥도 싸고 간식도 챙기고 부지런히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끊었다. 남편 왈

“누나가 일이 있어서 나보고 엄마를 절에 모시고 갔다 오라는데”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는?” 

나의 물음에 남편은 ‘우선 나와 아이들을 어린이대공원에 내려주고 우리가 놀고 있는 동안 어머니를 가까운 절에 잠깐 모시고 갔다가 오겠다 ‘라는 거였다.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나들이를 포기할 수 없었고 시누이의 일방적인 부탁도 거절할 수 없었기에 그러기로 했다.     

남편은 우리를 어린이 대공원에 내려주고 떠났다. 나는 아이들과 이곳저곳 구경하고 놀이터에서도 놀고 장난감도 사고 잔디에 돗자리를 깔고 챙겨 온 김밥과 간식도 먹었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남편은 함흥차사였고, 아이들도 나도 슬슬 지쳐갔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서 “언제 와? 애들이 힘들어하니까 빨리 와”라고 말하니

“생각보다 차가 막혀서 2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아”라는 대답에 어이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결국 아이들과 나의 귀가 방법은 택시였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하나 시누이의 일이라는 게 가족 등산이었다는 것이다.

열 받은 내 마음을 식히는 방법은 그저 3일 동안 남편을 투명인간 취급을 한 것뿐이었다. ‘시댁 가까이에 신혼집을 마련하지 마라’라는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구나! 생각했다. 아무 때나 예고 없이 5분 대기조인 것처럼 우리를 불러대는 가까운 시댁으로 자리 잡은 건 실수였나 보다.     


세 번째 상처는 눈물을 삼킨 상처였다.

부부 동반 모임이 있던 금요일, 나는 전날 생긴 허리 디스크로 모임에 가지 못했다. 아이들 먹을 저녁으로 김밥을 사 오고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7시쯤 시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김장 김치 하니까 와” 

너무 당황스러워서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없다. 난 바로 남편한테 전화했다. 

“지금 김장한다고 오라는데 뭔 소리야” 

남편은 이미 한잔 걸친 목소리로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김장한다고  우리 집에 있는 성능 좋은 채칼이 필요하다고 해서 당신이 갔다 줄 거라고’ 했단다. 과연 나는 채칼만 주고 왔을까? 아니다! 밤 11시까지 김장을 담그고 내 몸은 꼬꾸라진 파김치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내가 더 서러웠던 건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허리 디스크로 아프다는 것을 이미 알면서도 일을 시켰다는 것이다. 김장할 본인 딸이 힘든 것만 생각한 시어머니가 미웠지만 ‘엄마라는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면서 눈물을 삼켰다. 술에 취해서 들어온 남편에게 조용하고 단호하게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김장하러 가지 않을 거야”

 라고 말은 했지만 그 후로도 몇 년은 더 김장을 하러 갔다.     


내가 괜찮아지기 위해서 더할 것과 뺄 것

착한 며느리로 살다 보니 소소한 많은 사건들 속에서 나에게 남은 건 더 두껍게 쌓인 마음의 병이었다. 마음의 병은 우울감으로 나를 더욱 어두운 동굴 속으로 밀어 넣었으며, 아주 가끔씩은 천사 같은 아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했다. 문뜩 이러다가는 뭔 일이 날 것 같아서 심리 상담이라도 받아보려고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딸아이가 요리를 배우고 있던 비영리단체에서 ‘심리치료 독서모임’을 진행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신청을 했다.      


소수 인원으로 진행된 심리치료 독서 모임은 편안한 분위기였다. 내면 아이와 치유에 관한 많은 책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표현하지 않았던 여러 이야기들을 꺼내 놓았다. 서로의 이야기에 울음과 웃음과 경청과 공감을 하면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소중한 시간 있었으며 ‘아티스트 웨이 12주 창조성 워크숍’이라는 책을 통해서는 나를 깨워가는 연습도 함께 하였다. 매일 기상하자마자 써야 했던 모닝 페이지와 매 장마다 주어지는 과제를 실천함으로써 차츰차츰 내 안에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리는 기분이 들면서 숨 쉬는 공기도 상쾌하게 느껴졌다. 유화로 자화상 그리기도 해 보았는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본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으며 그림을 완성하고 나니 그림 속의 내 모습에서 따뜻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모임이 끝난 후에도 나는 예전의 우울한 모습으로는 돌아가지 않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 시댁과 신랑에게 ‘no’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조차 ‘무언의 yes’의 반응으로 일관한 나의 미성숙한 착함을 버리기 위해서 실천할 목록도 적어 보았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나 자신을 잘 대하기! 내가 하고 싶은 것부터 생각하고 표현하기! 때로는 싫은 소리도 하고 거절도 하기! 상대를 이해하기 힘들면 굳이 이해하려 애쓰지 않기!이다.     


“남을 위해 사는 착한 사람 말고, 나를 위해 사는 좋은 사람이 되기를”

정영욱 작가님의 ‘편지할게요’에 나오는 문구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한쪽에만 치우친 나를 잃어버리는 착함’과는 이별 연습 중이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남은 삶을 더 행복하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서는 꼭 해결해야 할 과제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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