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책임회피 사이
예능프로그램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 데뷔 25주년을 맞은 그룹 코요태가 출연했다. 타이틀 후보 두 곡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이 그려졌다. 노래를 들은 후 의견이 어떤지 묻는 신지에게 ‘너희 의견은 어떠냐, 자신은 둘 다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리더 종민. 그 후 각자 인터뷰하는 영상에서 종민은 스스로를 ‘항상 동생들의 말을 먼저 들어주는, 믿어주고 배려해 주는 보스'라 칭했고 멤버들은 ‘본인은 배려라고 하지만 떠넘기기 하는 회피형 리더'라며 답답하고 갑갑하다 말했다.
얼마 전 별 거 아닌 일로 남편과 언쟁을 벌이다 남편이 내게 했던 말과 코요태 멤버들의 말이 유사해 놀랐다. 남편이 말하길 나는 내 의견을 잘 말하지 않는단다. 책임질 일이 생길까 봐 그냥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표현을 많이 한다고. 헐. 그러는 당신은 의견을 말하면 잘 듣기나 하냐며 말꼬리를 잡다 끝이 났다. 눈부시게 유치한 싸움이었다. 글을 쓰는 현재 왜 다퉜나 이유도 가물가물하니 말 다했다. 그저 떠오르는 건 배려와 책임회피.
일전에 <이거 배려 맞나요?>라는 글을 쓰며 그 단어 자체의 뜻과 숨은 의미에 골몰했었는데, 다시 배려와 책임회피의 한 끗 차이를 두고 고민하는 나만 남았다.
'내가 책임을 회피하려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고? 십수 년 해온 공무원 생활도 강단 있게 접은 사람이 난데 뭐라 굽쇼? 아이 교육에 있어서도 철학까진 아니어도 나름 소신을 가지고 키우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 어쩐다고요?' 혼자 열을 올리다가도 어느 부분에서는 슬그머니 인정이 된다. 남편이 책임, 의견 운운하며 내 속을 긁던 이야기는 보통 메뉴를 고르거나, 여행코스를 짜는 어찌 보면 사소하고 귀찮은 일들에 대한 불만이기 때문이다.
아주 중요한 일(아이 교육, 업무 관련)이 아닌 이상 내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 편이다. 직장 생활할 때를 떠올려보면 회를 싫어하지만 회덮밥을 먹으러 가자는 팀원들을 군말 없이 따라나섰다. 덮밥집에 가서야 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백하고 알밥을 시킨다.(사실 알밥도 싫다ㅠ) 그러면 하나같이 "왜 말 안 했어?"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나는 그걸 배려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시부모님, 동서네와 떠난 통영 여행에서도 식구들은 그 지역 먹거리를 먹어야 한다며 굴 전문 식당에 갔고, 인원수대로 굴정식을 시켰다. 8명이 둘러앉은 테이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굴음식이 촘촘하게 놓였다. 굴밥, 굴전, 굴국, 굴찜, 굴무침, 굴탕수육... 굴을 좋아하는 다른 식구들 마저도 더 이상은 못 먹겠다 질려할 만큼 넘쳐났다. 나는 굴을 회보다 더 싫어한다. 하나 그날도 나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난 아무거나 상관없다 했다. 그게 배려니까.
아이 4살 때쯤 새벽에 일찍 깬 아이가 비몽사몽이던 나를 같이 놀자며 잡아끌어 새끼발가락이 삐끗했던 일이 있었다. 평소대로 구두를 신고 출근하는데 걸을 때마다 찌르르 전기가 왔다. 공교롭게도 토요일인 다음날은 과 단합대회로 산행이 계획되어 있었고 역시나 난 아프다는 말은 덮고 산을 올랐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내려왔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찾은 정형외과에서 발가락 골절로 깁스를 했다. 그러고도 병가를 쓰겠다 말을 못 한 채 왼발로 엑셀을 밟아가며 출근을 했다. 한창 바쁠 때였으니. 그게 팀에 대한 배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로 인해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을 그만둔 마당에 돌이켜보면 참 미련했다.
남편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가 배려라고 했던 행동들이 책임회피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회덮밥이 싫다 말하면 싫다 말한 장본인이 다른 음식을 정하고 어쩌면 식당까지 선택해야 하니 그 선택이 모두의 입맛에 맞을까 확신이 없다. 그들의 입맛을 책임지고 싶지 않다. 굴을 좋아하지 않는다 밝히면 모처럼 온 여행지에서 지역음식을 먹고 싶은 식구들의 기분을 깰까 망설여진다. 나 때문에 그때 통영에서 굴을 못 먹지 않았느냐 핀잔을 들을까 지레 회피해 버린다. 발가락이 아파 단합대회 참석이 어렵겠다 고하면 팀 단합력을 깨트릴까, 과 분위기를 흐릴까, 과장님께 우리 팀이 찍힐까 염려되었다. 그 책임이 나에게 돌아올까 봐 그냥 참는다.
나만의 배려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까보면 책임지고 싶지 않은 마음,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속내가 보인다. 그게 진짜 배려가 맞았다면 상대방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고마워했겠지. 나도 책임이니 뭐니 득실을 따지지 않고 쿨한 마음으로 했겠지. 하나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맞는 것 같다.
인생이 어디 입에 발린 좋은 소리만 듣고 살 수 있나. 살면서 싫은 소리 좀 들으면 어떻다고. 별 거 아닌 일조차도 싫은 소리는 손톱만큼도 듣기 싫어 배려를 운운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꼴이다.
늘 이 한 끗이 어렵다.
배려와 책임회피.
관심과 오지랖.
조언과 잔소리.
애착과 집착.
남편과 남의 편.(응? 이건 아닌가?;)
사진출처: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