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반 이상을 그 작가의 저작과 함께 보내게 해 준 것. 그리하여 나의 내면과 삶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일으킨 것. 그것만으로도 노벨문학상을 받든 말든 하루키는 나에게 언제까지나 가장 특별한 작가 일 터이다. - 아무튼 하루키, 이지수
우리에게는 모두 각자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에 푹 빠져좋아하고 함께 성장해 온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 이지수 작가님에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들이 그랬고, 애니메이션을 너무 좋아하는 남편은 월트 디즈니가 그런 존재라고 했다.
나에게는 피아노가 그런것일까?
5살 어린이집 대신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되었던 그때가 나와 피아노의 첫 만남이었다. 그 이후 나는 10년 동안피아니스트의 꿈을 품고 15살까지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나는 그 당시 서혜경 피아니스트, 손열음 피아니스트처럼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조금 일찍이 현실을 깨달았다. 그 꿈을 이루기에 내 실력은부족하고 힘들게유학을 10년 이상 다녀와도 그저 동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는 걸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또 다른 이유들로 품었던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보물 1호는피아노라고 말할 정도로 늘 나에게 1순위였던 피아노와 멀어진 뒤피아노로 가득했던 세계가 암흑같이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에 가서 깜깜해질 때까지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대신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한동안 내 속에 가득했던 피아노가 빠져나가고 나는 그것을 영어공부로채우게 되었다. 밤늦게까지 성문 기초 영문법으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던 나에게 엄마는 불을 끄며 이제 공부를 그만하고 자라고 할 정도였다.
아무도 나에게 피아노를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피아노를 그만 치겠다고 한 건 온전히 내가결정한선택이었는데도내 마음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마음이 공허해졌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난 뒤에야 내가 그때 왜 영어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공허해진 마음을 나도 모르게 무언가로 채우려고 했다. 19살 수능을 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영어공부뿐만아니라 학업에 열중하며 피아노에 푹 빠져 살던 나의 시간들을 잊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씩 피아노가 치고 싶을 때면 어릴 적부터 치던 나의 네이비블루 색이었던삼익피아노에 앉아한 번씩 내가 좋아했던 곡들을 치곤 했다. 그리고 나는 20살이 된 이후에도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면 가끔씩치곤 했다. 밴드 동아리에 들어가서 키보드를 쳤었고, 대학 졸업사은회 때 친구들의 노래에 반주를 했었고, 성당에서도반주를 했다.그리고서울에 홀로 올라와 신규간호사 시절 마음이 움츠려 드는 날이 자주 생겼다. 나는 그럴 때 피아노를 찾았다. 피아노는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어릴 적 배웠던 곡들을 연주하다 보면 상처받고 작아져있던 마음들이 조금은 한결 나아졌다. 그때 나는 내가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을 치곤 했다. 과거의 시간들로 돌아가서 그 시간들에 머물렀다.
시간은 그 후로 6년 정도 흘렀고, 나는 어느덧 내가 일하는 부서에서 연차도 쌓이고 안정적인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좋아했었던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일본 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주인공 노다메가 베토벤 비창 2악장을 연주하는 장면에서 비창 2악장이라는 곡이 내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마음 하나를 끄집어내었다. 속 깊이 정말 아름답게 내가 좋아하는 노을의 풍경들이 떠올려지며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러면서 갑자기 저 곡을 나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조그마한 용기를 내어서 피아노 학원을 찾아가서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처음 만난 5살 어린이 때부터 시간이 훌쩍 흘러 32살 어른이 된 지금까지 나는 여전히 피아노를 좋아한다. 피아노를 치는 그 시간 동안은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어떤 생각들 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악보에 집중하여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며 내가 내는 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그 순간, 공간 속에서 피아노가 나는 소리만 들릴뿐이다.
피아노는 멀어지려고 해도 또다시 어느새 나는 피아노 가까이에 와있었다. 나의 꿈이었던 피아노는 이제 그저 가까이에서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 같은 존재로 늘 내 곁에 있다. 이렇게 나는 계속 나이를 먹고 언젠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도 지금처럼 잔잔하게 내가 좋아하는 곡들을 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