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물건을 버리는 것은 그 물건과 함께 한 세월을 추억으로 환원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러다 어쩌면, 잊고 있던 기억을 발굴해 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 기억을 붙잡지는 말되, 아주 잊지도 말라고 알려주는 일.
나는 오래된 가구와 물건이 좋다. 엄마가 결혼할 때 가져온 보루네오 서랍장과 책장, 외할머니의 다듬잇돌, 마흔이 된 오빠보다 나이가 많은 골드스타 전자레인지까지. 오래된 것들이 가진 낡지만 견고한 그 결이, 때론 거칠게 남겨진 시간의 흔적들이 안방 장롱의 꿉꿉해진 나프탈렌 냄새처럼 되레 푸근하다.
소위 엔틱풍의, 한 때 유행을 선도하며 집집마다 들어앉았을 이 고풍스러운 식탁이 언제부터 우리 집 주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가만히 지나온 세월을 되짚어보면 20년은 족히 되는 듯하다.
학창 시절부터 20대를 지나 서른을 갓 넘긴 때까지, 내 청춘의 지난한 날들을 목격했을 녀석. 흠집 하나 없는 식탁과 달리 의자는 등받이의 가죽이 여기저기 터져 누런 속내가 튀어나오고 다리는 삐그덕, 성한 데가 없다. 한 때는 네 식구를 받쳐주었는데 그마저도 하나를 잃고 세 개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식탁을 내다 버렸다.
‘내다 버렸다.’라는 말은 참 냉정하게 들린다. 마치, 하면 안 되는 일을 저지른 듯한 기분이 든다. 한 가정의 역사를 함께한 식구를 매정하게 내친 기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 식탁이 있던 자리에 새로 들인 북유럽 스타일의 원목 식탁과 의자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심플한 디자인에 주변도 환해지는 밝은 색상과 매끈한 나무의 질감도.
그러다 분리수거장 옆에 내놓고 나서야, 여전히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낡은 식탁이 나를 붙들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그 모습이 기이해 보였다.
고마운 녀석, 좋은 사람이 데려가면 좋겠다 싶다가도 이대로 길에 두는 것이 못내 아쉬워 슬쩍 손으로 쓸어보며 고마웠다 읊조렸다.
식탁 위로 오고 가던 미지근한 말들, 웃음과 적막. 잔뜩 날이 선 채로 자기소개서를 쓰고 어떤 날은 가만히 일기를 쓰던 날들, 나를 살린 음식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내가 마주한 얼굴들을 그려보다 기어이 그 식탁에서 사라진 어떤 이를 불러냈다.
형태를 가진 것은 떠나가도 지나간 세월만큼의 기억은 돌아온다.
밖에서 아등바등하다가도 저녁이면 식탁에 마주 앉아 주린 속을 채우며 함께 그 하루를 털어내던 특별한 거 하나 없는, 아련한 기억들 말이다.
낡아버린 무언가를 버리는 것은, 가끔은 사람을 놓아버리는 일보다 쓸쓸하다.
오랜 식구 하나를 보냈다. 하지만 평범한 하루들의 온기와 온전함만은 남았다.
상실, '어떤 것이 아주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
느닷없이, 또는 예정된 대로 상실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렇게 없어지는 것은 본래의 형태를 잃지만, 어느 날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생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이 매거진은 우리가 잃어버린, 잃어버리고, 잃어버릴 것들에 대한 단상을 담았지만, 나는 우리가 상실이 아닌 회복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란다.